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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CSINÁLT RAIN EZEN A N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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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P HÍREI ÉS TUDÓSÍTÁSAI (áttekintés):
📰 Daily Economy - '게릴라…' 부활에 비판 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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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107 극진가라데 동계훈련(@일본 사이타마) 귀국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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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ECONOMY
매일경제
'게릴라…' 부활에 비판 거세
기사입력2003.01.07 오후 4:12
작년 7월 '김자옥ㆍ오승근 부부' 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던 MBC '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가 지난 5일 가수 '비' 편으 로 부활하자 시민단체에서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www.cncr.or.kr. 약칭 문화연대)는 "라 이브 공연을 왜곡하고 시청자를 우롱하는 '게릴라 콘서트'의 부활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논평을 6일 발표했다.
문화연대는 '게릴라 콘서트'가 콘서트라는 기본 틀을 가지고 있음에 도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왜곡된 공연문화를 보여주고 있 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연 중심의 방송이 아닌 특정 연예인 홍보 중심의 성격이 강하며 내 용 자체도 공연 중심이 아니라 관객 동원을 위한 홍보 모습과 가수들 의 눈물, 동원된 관객 수와 같은 부차적인 문제에 연연해 왔다는 것. 또한 '게릴라 콘서트'의 일정이 소속 기획사를 통해 사전에 알려지는 등 노출된 홍보를 통해 팬클럽을 동원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했 다.
김형진 문화연대 매체문화개혁위원회 간사는 지난 5일 방송된 '비' 편에 대해 "영화 때문에 잠시 가수 활동을 접겠다는 개인적인 사유를 특별한 이슈라고는 볼 수 없다"며 "그럼에도 제작진이 지난해 '게릴 라 콘서트'의 막을 내리면서 했던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에 한해 수 시편성을 하겠다'는 말을 근거로 프로그램을 재개한 것은 시청자와의 약속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 제작을 맡고 있는 권석 PD는 "오락 프로그램인 '게릴라 콘서트'에 음악프로그램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면서 "문화연대의 지적대로 '콘서트' 개념을 왜곡할 소지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모든 오락프로 그램이 연예인 홍보 프로그램인 셈"이라며 문화연대의 주장을 반박했 다.
사전 홍보에 대해서는 "소속사 측에 녹화 날짜를 알려주는 것은 섭외 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하지만 날짜 외의 정보는 일절 공개 하지 않기 때문에 팬클럽을 동원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또 '비'를 출연시킨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는 팬들을 위 해 자리를 마련한 것이므로 시청자와의 약속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고 해명했다.
<노현 기자 ocarina@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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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도 "비"내린다…의류·통신 등 1억2천만원
via ㆀR.U.rainㆀ[알유레인]의류 휴대통신 등 CF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비가 이번에는 카메라 CF에 나선다.
비는 최근 케녹스 카메라와 1억 2,000의 CF 계약을 체결하고 모델활동에 들어간다.
케녹스 카메라측은 "제품 이미지와 비의 날렵함 및 부드러움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판단"이라며 계약 배경을 전했다.
이미 CF 촬영은 지난해 연말 일본에서 끝난 상태며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TV 등 안방 시청자를 찾아갈 전망이다.
강수진 기자kanti@hot.co.kr
출처▶굿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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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오빠 아버지가 말하는 지훈오빠의 가족이야기
via ㆀR.U.rainㆀ[알유레인]-여성중앙 1월호 "인기가수 비, 떡방앗간 하는 아버지의 슬픈..-
요즘 인기 최고 가수 비 아버지 정기춘씨의 '가슴 아픈 우리 가족 이야기'
"2년 전 심부전증 아내 떠나보낸 뒤 아들에게 의지하기 싫어 시골에서 떡방앗간 하며 산다"
정기춘씨(47)를 만난 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아침부터 장에 내다 팔 떡을 준비하느라 정신 없는 모습이었다.
신세대 가수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스타 비(본명 정지훈)의 아버지가 모자를
눌러쓰고 다양한 떡을 빠른 손놀림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들이 유명해지면서 tv 출연을 한 탓에 얼굴이 알려져 이미 동네에서는 그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사진 촬영을 할 때도 동네 분들이 '포즈가 그게 뭐냐?'며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생각보다 훨씬 젊고, 출중한 외모(?)였지만 아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지훈이는 친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저는 쌍꺼풀이 있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데 할아버지는 키도 크셨고, 쌍꺼풀이 없이 큰 눈이셨어요"
이모 댁에 놀러 갔다가 생각지도 않게 배워 떡을 만들게 됐고,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떡집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다. 아들 지훈이와 3년 터울로 딸 하나를 낳았다. 추운 날 가게에 출퇴근을 할 때에는 늘 정씨가 어린 아들 지훈이를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은 유모차를 이용했는데 어린 아들은 엄마 아빠가 일할 때 울지도 않고 유모차에서 잠을 잤다.
주위 사람들은 아이가 순해 돈벌어준다고 했을 정도다.
"서너 살 때 신촌에서 한번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하루종일 찾고 돌아다녔는데 저녁 때가 다 돼 동사무소에서 아들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지훈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동사무소 직원이 데리고 와서는 아이가 너무 예쁘다고 퇴근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던 거죠."
지훈이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자라 주었다. 떡집을 하는 통에 설날이나 추석 등 바쁜 날에는 으레 가게에 나와 엄마 아빠를 도와주었다. 설날 기계를 이용해 가래떡을 써는 일은 고등학교 때까지 아들이 도맡아 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떡집을 한다는 것을 창피스러워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내색 안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신경을 안 쓴 부분도 있었겠지만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는 줄 알았던 아들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불쑥
"제가 안양예고 합격하면 허락하실 거예요?" 라고 물었다.
평소 아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말리지 않겠다' 고 말해오던 그는 쉽게
허락했다.
당시 예고의 경쟁률은 대단했지만 지훈이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지훈이의 담임 선생님이 지훈이가 합격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어려운 관문이었다.
지훈이가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는 선생님은 바로 그 중3때의 담임이다.
'합격 못한다'는 선생님 말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이론과 실기 시험에 대비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지훈이는 자기 방 천장에 '안심하면 무너진다' 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았다.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스스로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떠나 보낸 뒤 더 열심히 연습 몰두한 아들
고 1 때는 6인조 그룹 사운드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그룹에서 랩과 안무를 맡았지만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다. 솔직히 아버지 정기춘씨는 아들이 뭘 하고 다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학교 생활을 충실하게 해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지훈이는 성실한 아이예요. 용돈을 주면 절대 헤프게 안썼습니다. 그래서 늘 통장이 불어났죠. 유일하게 신발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신발 모으는 취미가 있었거든요. 그때 모아둔 신발들을 이제껏 제가 다 신고 있죠."
중고교 시절까지 어렵지 않은 형편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내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두 아이를 키우기는 힘들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친 건 99년 초부터. 일을 하던 아내가 손을 다쳤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었기에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어도 솔직히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게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중병으로 여기질 앉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후회됩니다..."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쉽사리 피로를 느끼는 병을 앓았음에도 아내는 평소와 똑같이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깨우쳤어도 아내를 쉬게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렇게 쉽게 합병증까지 얻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면서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게를 내놓아야 했다.
가게를 팔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서 '브라질로 가서 2~3년 고생하면 목돈을 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아픈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99년 7월,
비행기에 올랐다.
출국 전 아픈 아내에게 타지로 떠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 지훈이에게 편지를 쓰고 떠났다.
"얼마 전 방송에서 지훈이가 그때 나를 얼마나 원망했고, 어느 정도 힘들었는지를 울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봤어요. 아버지로서 너무 미안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지훈이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기에도 벅찬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아픈 엄마와 어린 여동생을 떡집을 처분한 얼마의 돈으로 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지훈이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고 갔다고 생각 했답니다.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다 강하게 만들어줬다고 얘기하더라구요."
브라질로 건너간 그는 친구 말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경허해야 했다.
2~3년에 1억이란 돈을 벌려면 하루 24시간 이상 일에 매달려야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보다 인건비가 싼 그곳에서 생활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두달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의 집에 월급을 받으며 떡 만드는 기술자로 취직을 했다.
20년이 넘게 내 장사를 하다가 남의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악화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뭐든지 해야 했다.
지훈이는 학교와 연습실, 그리고 병원을 오가며 생활했다.
딸 하나 역시 일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있는 병원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힘든 생활 속에 버틴 가족들이었지만, 아내는 2000년 11월 심부전증에
의한 패혈증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지훈이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음악과 춤에 빠져 지내던 그는 스타 제조기 박진영에게 직접 찾아가 오디션을 받고 발탁됐다.
고3때부터 안무 연습실에서 생활했다. 하루 8시간 춤을 췄고, 밤에는 노래 연습을 했다.
"지훈이가 그래요. 너무 힘든 시기 였지만 춤과 노래 외에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아예 없었다고요. 그래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사춘기를 그렇게 넘긴
거죠."
박진영은 "한 달에도 수백 병의 가수와 팀이 나오는데 성공한 팀은 거의 없다.
그 안에서 성공하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 지금 연습은 같이 하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실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앨범을 내준다는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라며 지훈이를 자극했다.
한창 연습을 하던 시기에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자 지훈이는 박진영에게 엄마
이야기를 했다.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훈이의 엄마를 본 박진영은 환자를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병원비를 걱정 말라는 박진영의 말을 뒤로 한 채 엄마는 '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며 퇴원을 강행하기도 했다. 엄마를 잃은 지훈이는 더 연습에 전념했다.
하루에 2~3시간만 자고, 연습에 몰두해 코피를 쏟기도 여러 차례였다.
혹독한 연습은 2년여 동안 이어졌다. 중간에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훈이는 프로듀서 박진영을 믿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언제 앨범 나오냐?' 고 묻지 않았고, 아들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인내한 지훈이는 작년 4월 드디어 첫 앨범을 녹음하고, 박진영이 지어준 '비' 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목표가 분명하고 언제나 최선 다하는 아들이기에 걱정 안한다
지훈이의 좌우명은 '끝까지 인내하자. 끝까지 겸손하자. 끝까지 노력하자'다.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중고교 시절부터 지훈이 직접 만들어 새기던 말이다.
지금의 지훈이를 보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요즘 애들은 연예인이 되겠다고 학원도 다니고 그런다는데 지훈이는 순전히 혼자서 모든 걸 알아서 했다. 부모가 걱정할 만한 행동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정말 제 아들이기 이전에 지훈이를 보면 많이 배웁니다. 내가 지훈이처럼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 하고 묻기도 여러 번이었어요.
제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 해놓은 게 없습니다. 흐지부지 그렇게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훈이를 보세요. 자기 목표를 정하고 노력해서 되고 싶던 가수가 되었잖아요. 저는 지훈이는 걱정 안 해요. 아들이기 이전에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들을 보며 인생을 깨닫게 되었다는 그는 그래서 고향도 아닌 충청도 무극에 떡집을 차렸다.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떡 만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용산과 집과는 1시간 30분 정도 거리. 거의 출퇴근을 하고
있는 그의 떡집 앞에는 아들 지훈이의 큼지막한 브로마이드 사진이 걸려 있다.
"떡을 만들다가도 지훈이를 보면 힘이 나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얼마 전 지훈이는 '아빠! 한번 내려갈까? 친한 god 형들하고 내려가면 좋을 것
아니야?' 라고 물어오기도 했다. 그는 절대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도 듣기 싫을뿐더러 늘 미안한 아들에게
부탁할 일도 아니다 싶어서였다.
"남들이 더 쳐다보는 가수가 돼서 아빠가 떡집 한다는 걸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먼저 그렇게 물어오니까 정말 자식 하나는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쁜 아들이 신경 쓸까 문자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는 그는 얼마 전 목돈이 생겼다며 아빠 통장에 입금시켜주겠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네가 어렵게 번 돈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어요. 음악 프로듀서나 패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나중에 필요한 자금으로 쓰라고 말이에요. 지훈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말 테니까요."
곧 지금의 떡집을 처분하고 고3이 될 막내딸과 함께 지내면서 멋진 퓨전 떡집을
낼 생각이라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은
하나가 아닐까. 나보다는 자식이 더 건강하고, 멋진 성품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는 이로 자라는 것. 마흔이 넘도록 하나도 해놓은 게 없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큰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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