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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영화 <바람의 파이터>
03.06.14 10:53최종업데이트03.06.14 15:33
네티즌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일었던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제작이 내년으로 연기되었다.
▲ 영화 <바람의 파이터> 주연 가수 비ⓒ 드림서치 |
<바람의 파이터>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재일교포 무도인 고 최영의 (일명: 최배달, 일본명:오오야마 마쓰다쓰) 극진가라데 총재의 일대기를 그린 방학기 화백의 만화로 2001년 드림서치와 <리베라메>의 양윤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로 결정되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과 무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주연배우를 공개오디션으로 선발하겠다는 제작사의 발표에 신인연기자, 배우지망생, 무예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2002년 2월의 1차 오디션에 이어 3월에 열린 최종 오디션 참가자 총 70명의 단수가 390단이나 되 화제를 뿌리기도 하였다.
이런 요란한 오디션을 거쳤으나 11월 17일 제작발표회에서 발표된 주인공 최 배달역을 맡은 사람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가수 비였다.
위대한 무도인의 역할에 아이돌가수가 케스팅된데 대해 네티즌들과 무예인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오디션을 왜 했느냐, 주연배우 비가 출연한 시트콤에서 보여준 연기로는 영화는 무리다, 이소룡이나 이연걸처럼 무술을 잘 하는 사람이 주연을 맡아야 된다, 송강호나 유오성같이 뛰어난 배우를 캐스팅하라, 비의 이미지는 최영의와는 다르다라는 의견에서 부터 비와 감독, 제작사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 글까지 제작사의 홈페이지는 다운될 정도로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특히 당시 오디션 현장을 취재했다는 익명의 네티즌이 올린 오디션 이야기는 강한 신빙성을 가지고 네티즌 사이에 퍼져나가 분노는 더해만 갔다.
주연배우 비는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많이 싸우지는 않았지만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이길 때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일단 시작하면 이겨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라는 발언을 해 네티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비의 돌출 발언으로 이런 현상은 계속 되었다.
이후 7개월이 지난 지금 네티즌들과 무예인들의 반응은 많이 사그러 들었고 제작사 홈페이지 게시판은 조용해졌지만 영화는 제작과정부터 수없는 문제점을 노출시키며 표류하고 있다.
주인공 비와 상대역에 캐스팅에 된 유민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캐스팅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한때 제작사의 홈페이지에는 오디션에는 통과했으나 배역도 대본도 받지 못 했다는 오디션 합격자들의 항의의 글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준비의 부족과 잇단 대작영화들의 실패로 인한 영화 투자 열풍의 냉각으로 영화는 3월 초 겨울 수련신을 촬영이외의 모든 작업을 내년 1월로 연기했고, 올 추석으로 개봉일정은 실질적으로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2집 작업과 중국어권 진출을 계획하고 있던 비 측과 어느정도의 마찰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리고 연말 이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영화를 위한 연기수업과 트레이닝에 전념하겠다던 비도 계속해서 바쁜 스케줄을 유지해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있다.
무신이라 불리는 고 최영의 총재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50억의 제작비를 들이는 초거대 프로젝트 <바람의 파이터>에 많은 네티즌과 무예인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깨고 뛰어난 영화로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졸작이 될 것인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표류하는 바람의 파이터에 사람들의 시선은 쏠려 있다.
▲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영의 ⓒ 국제공수도연맹 |
바람의 파이터 진행 과정
2001년 11월 4일 드림서치, 양윤호 감독과 영화 바람의 파이터 제작 발표
2002년 2월 1차 공개 오디션 실시
2002년 3월 최종 공개 오디션 실시
2002년 11월 17일 드림서치 주인공 최배달역에 비가 캐스팅 되었음을 발표, OST 작업에는 박진영을 프로듀서로 JYP사단이 대거 합류하기로 함
2002년 11월 17일 부산에서 제작발표회, 2003년 추석경 개봉 예정
2003년 1월 비 일본 극진회 동계훈련참가, 이후 허리디스크의 악화로 인한 통증호소
2003년 3월 3일 비의 상대역에 유민 캐스팅
2003년 3월 5일 '겨울 산속 수련장면' 촬영
2003년 3월 17일 드림서치 홈페이지에 바람에 파이터 관련 제작 진행상황과 계획을 공고. 현재 모든 계획은 중단, 연기되어 있음
2003년 4월 비, 드림서치 제작진 일본으로 사전답사
2003년 6월 바람의 파이터 촬영 스케줄 내년 1월로 연기
▲ 최영의 ⓒ국제공수도연맹 극진회관 |
최영의 (일명: 최배달,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다쓰 大山倍達 1923 ~1994)
세계 무도사를 새로 쓴 전설의 무도인
1923년 전북 김제 출생. 1938년 16세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에 있는 군관학교에 들어가 가라데에 입문한다.
1947년 24세때 京都에서 열린 전후최초의 무도대회 가라테 부문에서 우승하였고 선배 조형주의 권고로 1948년 치바(千葉)顯남부에 있는 키요즈미산에 들어가 18개월간 산중수련을 한다. 1951년 하산해 자신만의 가라데세계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52마리의 황소와 맨손으로 결투를 하게 되는데 그중 26개의 소뿔을 잘라버리고 세 마리를 즉사시켰고 쇼오찌쿠(松竹)영화사가 촬영한 20분 분량의 소와의 사투 필름으로 그는 전국적 유명세를 타게 된다.
이후 전세계를 돌며 여러 무술의 고수들과 무려 100여차례의 사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는 신화를 이루어 낸다.
1964년 극진회관을 설립 초대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극진가라데를 전세계 520여개의 극진회관, 천만여명의 수련생을 가진 최고의 무도로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 ITF 태권도 총재였던 고 최홍희와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일본 청소년들이 뽑은 '일본의 위대한 역대 10걸'중 한명으로 뽑히자 극진회 후원장이었던 사토 전 일본 총리가 "외국인의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귀화를 권유해 일본으로 귀화하였다.
한국에서도 그의 생을 소재로 한 <대야망>, <바람의 파이터>등의 만화가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도올 김용옥은 그를 가르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국제적 거인이었고 우리는 이 역사적 거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릴 만큼 한가롭지 못했고 또 가치기준에 있어서 다원화되어 있질 못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71세의 나이에 타계. / 남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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