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ÉNTEK / FRIDAY
MIT CSINÁLT RAIN EZEN A N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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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P HÍREI ÉS ESEMÉNYEI (áttekintés):
📰 Cine21 - 이제는 겸손해지고 싶지 않다, 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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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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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
2006년 12월호
via Flow Blog 2007.01.01.
신데렐라 맨
4집 로 여의도 방송가와 세계 콘서트 무대에서 폭풍을 일으킨 가수 비,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작품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영화계에 후폭풍을 일으킬 배우 정지훈.
그를 인터뷰하면서 나는 '신데렐라 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비에 대한 촬영을 준비하면서 내 머릿속에 최초로 떠오른 뒤죽박죽 이미지 목록은 이랬다.
첫 번째,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신사 -마그리트의 그림<골콘다> 혹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두번째,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 공연계와 CF계에 신드롬을 일으킨 팝과 클래식의 크로스 오버. 세번째, 구름속의 비 -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후신을 풍자한,
그러나 알고 보니 비의 팬클럽 이름과 유사함.
거대한 날개와 덩굴나무, 그리고 요정 같은 발레리나들에 대한 장황하게 떠드는 나를 앞에 두고
사진작가 조세현은 '월드스타 비는 그 존재감만으로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그 말은 반쯤 맞고 반쯤은 틀렸다.
촬영 당일, 드디어 '비님'이 오였다. 여기서 '비님'이란 저널리스트 특유의
시선이 만들어낸 시니컬한 어휘가 아니다.
비는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촬영 스태프들, 그리고 족히 10명은 될 듯
보이는 패밀리 스태프들...말하자면
구름의 호위를 받는 기후신처럼 인의 장막 속에 등장했다.
그건 거대한 행렬처럼 보였고, 분장실 주위엔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이 쳐졌다.
맙소사, 한번도 이런 분위기에서 촬영을 진행해본 적이 없어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세계톱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인 나는 전열을 가다듬고
'월드스타'의 분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비 씨? 아니 지훈 씨? 어떻게 불러야 하죠? 어째든 만나서 반가워요."
폭격 맞은 잔디 같은 머리카락을
쑥스러운 듯 만지면서 비가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호칭은 뭐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제 머리카락이 손보기 전이라 엉망이에요."
우리는 잠시 서서 웃으며 비의 컴백 무대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아시다시피 입꼬리가 올라가는 비의 천진한 웃음은 모든 여자들을 연상의 누이처럼 만든다.
나는 그에게 '영원히 따뜻한 별이 되길' 이라고 적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기를 선물했고,
비는 내게 '많이 들어주세요'라고 쓴 4집 CD를 선물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빡빡한 시간 속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강예나와 단원 김애리,배소희, 이상은, 김유선이
눈처럼 흰 발레복을 입고 몸을 풀고 있는 사이, 비가 랄프로렌의 클래식한
스트를 입고 들어왔다. 비는 발레리나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고요하고 집중력 있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다들 수능 직전 도서관에 모인 근엄한 수엄생들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먼지 알레르기를 호소하며 몇번 재채기를 한 게 고마울 정도였다.
한 치의 소음도 잡음도 없는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
발레리나들이 비를 둘러싸고 구애하는 듯한 포즈를 취할 때도, 비는 신사적이고
절도 있고 약간 나르시즘적이면서도 모범적인 제스처를 연출했다.
내가 의도했던 땀과 활력이 출렁대는 다소 장난기 있는 방탕한 무드는 아니었지만,
비와 발레리나는 서로의 역활을 중심으로 예의 바르고 균형감 있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리허설이나 주문 없이도 서로 합을 딱딱 맞추는 즉흥 안무 같다고나 할까.)
그건 어느 정도 랄프 로렌적이었다. 랄프 로렌룩은 고객을 쇼킹하게 만들기보다는 교육을 받은
하이클라스가 몬타나의 플라이 낚시 여행갈때 꺼내 입는 랄프 로렌의 재킷과
코트가 밀리터리 팬츠와 찢어진 러닝 셔츠를 입고 춤추는 스물 네살의
대중 뮤지션 비에게 어울린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비와 발레리나와 랄프 로렌이 만들어내는 이 정중하고 안정감있고
극도로 수줍은 촬영의 키워드를 발견해내려고 애썼다. 미스터리는 풀렸다.
퍼펙트 프로포션! 프레시 프렌십! 그리고 프로페셔널 프로퍼겐다!
지금 비는 클리식 문화를 사랑하는 젊고 젠틀한 후원자로 분한 것이다.
비가 촬영을 하는 동안 JYP 엔터테이먼트 소속 다섯 명의 매니저들은
아래층 테이블에서 스케줄 보드를 놓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줄담배 연기 사이로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내가 지훈이 나이인 스물네살땐 마음껏 내키는 대로 즐기며 살았지."
"지훈이는 지금 이 엄청난 스케줄 속에서 죽을 맛일 거야."
이날 비는 <보그>와의 촬영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입양을 기다리며 보모의 팔에서 잠 든 미혼모의 아기를 품에 안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 조세현의 연말 자선 프로젝트에 동참하기 위해.
그 다음에도 몇 개의 방송 프로그램 스케줄이 그를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뮤직뱅크><음악중심><인기가요> 몇개의 오락 토크쇼와
라디오 게스트...스케줄, 스케줄, ?L이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
돌아오면서 나는 그의 단말마 같은 음성들을 떠올려 보았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거죠?" "아기는 어디 있나요?" 등등.
인터뷰를 위해 비를 다시 만난 건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어느 일요일 저녁 6시, 청담동 JYP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서 였다.
밖에는 일단 소녀팬들이 비를 행한 온갖 구애의 낙서로
빼곡한 건물의 주창장과 제과정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비를 기다리면서 나는 국수적인 한국 가요계를 세계적인 쇼비즈니스 무대로 접근시킨
영리한 마케터 박진영의 아우라를 관찰했다.
지하 안무 연습실과 위층의 작곡 스튜디오를 오가는 예쁘장한
미래의 남녀 가수들이 나를 볼 때마다 검은 눈을 빛내며 "안녕하세요?" 라고 우렁찬 인사를 했다.
어떤 아이는 무려 일곱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들은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외부인들에게 그렇게 정중하고 명랑하게
자신를 알리는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하긴, 비는 초기에 박진영에게 안무 연습과 함꼐 매일 신문 사설을 읽고
의견을 말하는 교육을 받았다지.
엔터테이너는 사회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철판에 'JYP Styl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1-모든 일에는 책임자가 있다.
2-모든 일엔 Deadline이 있다.
3-모든 일엔 가능한 방법이 있다.
4-모든 일은 시스템 속에서 한다.
헉! 저 문구는 가수가 아닌 잡지 기자에게 더 어울릴법한데!
사실 이 모든 것이 비의 성분을 이루는 하드웨어이자 소프트웨어일 것이다.
비는 미래적인 경영 마인드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쇼비즈니스 그룹에서 성장해왔다.
그가 단 4년만에 멀티 엔터테이너, 글로벌 스타로
성장한데는 개인을 산업화시키는 이런 자율적인 시스템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다섯명의 매니저 중 한명과 월드 투어 콘서트와 영화 홍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비가 들어왔다.
밀리터리 캡을 아무렇게나 눌러쓰고 체크무늬 후드코트, 블랙 스노 진을 입은 비는
심하게 호흡을 헐떡거렸다.
학동 사거리 근처에서 콘서트 회의를 하다가 달려온 것이다.
술 마시고 뛰어다니는 것 외엔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던 나의 수다스러운 스물 네 살에 비해,
그의 삶이 너무 규모가 크고, 즐거움을 주기 위한
공적 책임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그때요, 왜 며칠 전 촬영 때...발레리나 분들과 처음 해보는 거지만, 저 좋았어요.
발레를 좋아하고 발레리나를 존경하거든요.
노래, 연기, 춤, 발레 모두 뼈를 깎는 고통 같은게 있잖아요.
그게 그냥 직업이라기 보다는 천직, 같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말은 안 해도 존경심이 생겨요.
저 그분들 공연, 기회가 되면 꼭 보러 가고 싶어요."
그 순간 나는 스물 네 살 청년의 연한 속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보호적인 딱딱한 갑각류 성에서 나온 향기롭고 연한 청춘의 냄새.
사실 사진 촬영 이후 비와 인터뷰 스케줄을 잡는 것이 힘든 외교 협상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배우들과 달리 방송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는
TV토크쇼를 제외한 어떤 단독지면 인터뷰도 거부해왔다.)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신문 기사들은 단발적으로 그의 행보을 보고했다.
비가 암투병 중인 한 주부의 병원을 깜짝 방문해 위로했고,
4집 <레인스 월드>가 발매 첫날 10만장을 기록해 대박을 예고했다는 등등.
나는 그에게 스믈 네살에 이런 거대한 스케일의 삶을 살아내는 게 버겁지 않은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스케일이 크지 않아요.
사람들은 거대한 물량이 투입된 무대에서 춤추는 저를 봐요.
하지만 보세요. 실제로 전 아주 작아요.
무대에선 카리스마 넘치게 행동하지만 전 제가 끝도 없이 부족하다고 느끼죠."
"하지만 아시아 전역을 돌고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려 하잖아요?"
"제 진짜 활동 범위는 이 건물의 지하와 지상이 전부예요. 제가 24시간을 보내는 세상은
녹음실, 스튜디오, 연습실이 전부인 걸요."
창밖에 소녀 팬들이 무리를 지어 유폐된 성에서 땀을 흘리는 그를 지키고 있다.
"하나하나의 일을 할 때마다 에너지의 집중력이 너무 커요.
그 고통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 못해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콘서트 회의, 춤 연습, 영화 홍보, 인터뷰...
그런데 어차피 할 거면 제 욕심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저는 아이돌 가수로 시작해서 연기자가 됐고, 다시 가수로 배우로
해외 진출까지 하려고 해요.
저는 '아이돌'에 화려하게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 대체되고 사라지는 게 싫었어요."
그는 파워풀한 댄스를 소화하는 이웃집 소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스타 비가
왜 배우 정지훈이라는 또 하나의 삶의 배역을 선택했는지에 질문의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연기를 시작할 때 제 결심은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자, 였어요.
<상두야 학교가자>로 드라마를 할 때 가수가 연기한다는데 편견이 많았어요.
연기하면 망한다고 다들 말렸어요.
단 한 명도 내 편이 없었어요.
진영이 형 조차도요. 그런데 전 연기에 욕심이 났고 그런 저를 믿었어요."
비의 말은 폭풍처럼 이어졌다. 마치 자신의 4년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말을 쏟았다.
"<상두...>에서 다른 사람이 되서 즐거움을 맛봤어요.
그 드라마가 일본에서 히트 치면서 한류의 발판이 됐어요.
과도기를 겪었고 앨범을 냈고, 다시 <풀하우스>를 촬영했어요.
그 다음은 일본, 중국, 태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나갔어요.
3집을 시작하고 박찬욱 감독님 영화를 찍고
4집 를 내고 이젠...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시겠어요?"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스타 시스템'에 관한 포럼에서 JYP엔터테이먼트의
정욱 이사는 "훌륭한 엔터테어너 한명은 산업 전체가
해외 비지니스를 할 수 있는 표준을 만들어낸다."고 비를 프레젠테이션 했다.
비의 아시아 진출 과정은 국가에 따라 드라마로 면저 알려지거나 음반 활동을
먼저 시작하는 등 다양한 과정이 있었다.
이런 효과는 광고에서도 반복된다.비가 등장하는 광고에는 대부분
비가 직접 부른 노래가 삽입된다.
비는 이제 특정 타깃에 의해 소비되는 대체품이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생산하고 현상을 만들어가는 '오리지널 인더스트리'가 된 것이다.
"1년만에 큰 변화가 있었어요.
아시아인 중에 남자 가수나 배우가 톱이 될 수 있는 시기가 온 거죠.
'타임100인'에 선정된 것도 세계 시장에서
아시아 스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걸 인정하는 거하고 생각해요.
할리우드가 이연걸,재키 찬과는 다른 아시아 스타를 찾고 있다고 느꼈어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가 말했다.
"<캐리비안의 해적3>의 주인공도 주윤발이 캐스팅 됐어요."
"제리 브룩 하이머를 만났어요?"
"네, 제리 브룩 하이머를 만났어요.
올랜도 블룸, 조니 뎁 대신 아시아 스타를 등장시키고 싶다고 했어요."
물론 영화계의 케스팅은 언제나 변수가 많다.
하지만 부산영화제 필름 마켓에서 할리우드에서
비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뉴스만 전해들은 나는 아직 영화 데뷔작도 공개되지
않은 비가 전설적인 할리우드의 프로듀서를 만나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게 놀라웠다.
"<타임100인> 행사에서 만났어요.
내년엔 배우로서든 가수로서든 선택해서
둘 중의 하나에 더 집중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전 언제나 준비되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월드투어를 시작하면서 영어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내년엔 모든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것 같아요."
비는 4년만에 이뤄낸 이 기적 같은 일이 어머니가 가져다 준 행운이라고 말했다.
"노력도 정말 많이 했어요. 하지만 시대적인 타이밍의 힘도 정말 무서워요.
아시아 전역이 Rain이라는 이름을 알린게 <풀하우스>였어요.
그런데 배우들은 보통 "안녕하세요?"만 하지만, 전 노래를 하잖아요.
그렇도 발라드가 아니라 강한 비주얼이 함께 들어가니까 폭발력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는 지금 박찬욱 감독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복수 3부작 시리즈 이후 박찬욱 레이블의 새로운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세계 정신병원 최고의 커플,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소녀와 죄책감과 동정심이 없는 안티 소셜로 판정된 소년의 '사이코델릭한' 사랑이야기.
나는 매번 경천동지할 캐릭터와 스타일로 배우를 재창조하는
박찬욱이 이번엔 어떤 장난끼 어린 마법을 선보였을지 궁금했다.
"나 너 미워서 이러는 거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던 송강호, '누구냐, 너?"라고 칼을 갈던 최민식,
"너나 잘하세요."하고 조롱하던 이영애.
그리고 이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정지훈의 광적이면서도 팬시한 내레이션.
"<사이보그...>는 유럽에서 많이 기대하고 있대요.
음, 제 느낌엔 야구방망이로 뒷통수 맞는 그런 충격이 있을 거예요.
누구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스타일리시하고 웃기고 호러블하고...사람을 들었다 놨다...
사실 감독님 만나기 전에 초대박 영화 시나리오 3개가 들어왔어요."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과 그로부터 받은 영감에 대해 비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 했다.
우연한 술자리에서 박찬욱이 물었다.
"넌 뭐 좋아하냐?"
"액션 좋아합니다."
"액션만 하냐?"
"네?"
"난 멜로 할 건데 관심있냐?" 그렇게 둘은 의기투합했다.
"반찬욱 감독님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잘 모르세요.
많은 배우들이 박 감독님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시죠.
전 박 감독님의 오래된 팬입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초등학교 때 봤죠. <삼인조>는 중학교 때 봤구요.
<...JSA>와 복수 3부작 시리즈...그분은 제가 생각해온 많은 것을 바꿔놓았어요.
예를 들어 '그 배우 연기 잘하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감독님은 이러세요.
'별로인데. 그게 연기냐? 꾸미는 거지.'
사질 전 <이 죽일 놈의 사랑>을 하면서 진실한 연기에 푹 빠져 있었어요.
사람들이 오버한다고 수군대도, 정말 다른 사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짐승처럼 울기도 했구요. 이경희 선생님 대본에서도 그런 진짜 감정을 배웠거든요."
그러나 반찬욱은 그에게 진실된 연기도 하지 말고 꾸민 듯 꾸미지 말라고 했고,
정신병원엔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했다.
"어떤 모습이 나올지 저도 궁금해요."
나는 그에게 스타가 된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배불러졌죠. 굶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사람이 많아졌고, 하지만 잘 될 때 붙는 사람들 중엔 조심해야 될 사람도 많죠.
하지만 제 눈엔 다 보입니다.
제겐 어머니라는 종교가 있어요.제 앞길에서 저를 인도해 주시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예술가 타입은 아니셨는데...
이상하게도 전 어릴 때부터 이게 아니면 안 됐어요. 사회 나가서 가게를 하나?
공부를 열심히 하나? 그냥 춤추고 연기하면서 아이들한테서 박수받는 게 좋았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놀라운 건, 그가 내가 하려는 질문을 마치 독심술을 하려는 것처럼
한발 앞서서 읽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가 힘든 성장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어미니가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 그는 병원비가 없어서 혼자 울었다.
그리고 2년간 JYP 엔터테이먼트에서 청소하고 신문을 읽고 열심히 인사하고 춤을 췄다.
남보다 일찍 고퉁을 이기고 성장한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안는 사람,
그 꿈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겐 생에 대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있다.
그는 자신의 큰 재산으로 3가지를 들었다.
첫째, 가족.
둘째, 언제 굽혀야 하고 언제 지켜야 할 줄아는 유연한 자존심.
셋째,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현재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자신을
매년 업그레이드 되는 최신 휴대폰이나 과장,
대리 말단 사원을 조율하는 CEO, 혹은 애플사에서 개발한 아이팟에 비유했다.
그리고 자신을 발굴했던 박진영에 대해 "진영이 형은 늘 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분이시죠" 라고 얘기했다.
"저는 비난 받을 수록 성장하는 사람이예요.
작년 1월에 한 기자분이 제게 비꼬는 듯한 투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한다'고 했죠.
뉴욕 공연 후 공항에서 그분을 만났어요.
제 눈을 피하시길래, 더 다가가서 인사했어요.
누구나 전성기가 있고 거기서 내려와 떨어져야 할 때도 있어요.
내려오면 다시 산을 찾아 올라가면 돼요.
전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언젠가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때도 있겠죠.
그러면 전 거기에 연기를 플러스할 거고, 춤, 노래, 그리고
영어를 플러스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할 거예요.
토끼와 거북이의 싸움처럼 끝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전 또 산업 디자이너로 사업가로 변신해서 앞으로 갈 거예요.
저는 제 스스로 다른 사람이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될 거예요.
90년대 서태지가 그랬던것 처럼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저는 매년 새로운 비가 될 거예요."
지금은 사라진 역대의 많은 아이돌 스타들은
한 곳에 머물면서 이 스타덤이 계속 유지되길 바랐다.
때론 벅차게 감사하고 때론 극도의 불안에 떨면서
(심지어 몇몇 어린 가수는 불안감을 못 이겨유서를 쓰고 자살하기도 했다).
비가 그런 수동적인 태도를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면서 얻게 된 예정된 결과는 그의 커리어에 유효 기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비는 내성적인 동시에 정열적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문득 나는 폭우 속을 달려가는 한 마리의 하얀 유니콘이 떠올랐다.
만약 누군가 비에게 심술궂은 비평을 한다면 그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올 초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공연에 대해
<뉴욕타임즈>가 "마이클잭슨의 카리스마와 어셔의 섹시한 매력,
팀버레이크의 팝적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고 혹평했다면
그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질주할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집에 오니, 지난 주 비가 출연한 오락 프로그램이 재방송 되고 있었다.
셔츠와 타이로 댄디한 멋을 낸 비가 TV속에서 말했다.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누나가 변심을 했어요.
저보다 다른 남자가 휠씬 부유하고 집안이 좋았던 거죠.
그때 울고 또 울면서 이를 악물었어요.
여러분, 부디 남자의 현재보다 남자의 책임감과 야망을 봐주세요."
그순간 나는 영화 <신데렐라 맨>이 떠올랐다.
대공황 시기, 가난과 부상으로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린
도전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복서 브래독의 별명.
그리고 헝그리 댄서에서 월드 스타가 된 비,
밟히며 더욱 강해지는 비에게 한국판 신데렐라 맨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처[2006.12-보그 코리아 (에디터/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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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21
이제는 겸손해지고 싶지 않다, 정지훈
글 박혜명 사진 오계옥 2006-12-01
-첫 영화라 당연히 긴장할 거라 예상했는데 4년의 경험과 경력 때문에라도 노련할 수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얘기한 게 거의 맞다. 왜냐하면 누구나 하는 말처럼 (겸손한 말투로 바꾸어) 첫 영화라 긴장됐고요,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 신인의 자세로 봐주세요, 그런 것보다는 (본래의 말투로) 굉장히 열심히 했고, 이제는 감히 배우라는 이름을 쓰면서 첫 계단을 밟을 수 있게 돼서 행복하고, 촬영하면서도 행복했다. 드라마를 세 작품 했지만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와 시선이 있지 않나. 그런 게 많이 바뀌었고 이 영화를 통해서도 많이 바뀔 거다. 아, 저 사람이 저런 능력과 저런 욕심이 있구나, 연기에 대한 배우에 대한. 그런 것들이 보일 것 같다.
-연기자로서의 준비는 어떻게 해온 건가. 드라마 세편의 연기는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엄청난 노력과 준비의 결과일 것이다. =실은 연기자로 데뷔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운이 좋아서 가수로 성공하고 배우의 길도 가려고 하는데, 글쎄 나는 아직도 성공이란 단어가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물론 대외적으로, 아니면 가수로서 광고를 많이 찍는다거나 음반을 많이 판다거나 해외에서 많은 걸 한다거나 드라마가 해외로 많이 팔려나간다거나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인기는 거품과도 같다. 언제 떨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결국 실력이라고 본다. 운이 좋아서, 작품을 잘 만나서, 노래를 잘 만나서 잘될 수는 있다. 근데 그 이후에는 자기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렸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잘 밟아서 올라갔을 때 산 정상에 서면 요령을 얻는다. 그러면 그 다음엔 더 큰 산을 넘어갈 수 있는 거다. 가수로서는 한 산을 올라왔지만 더 큰 산을 노려보고 있는 거고, 연기에 대해서 지금 한 계단을 성공리에 밟고 있는 기분이다. 그걸 박찬욱 감독님과 함께한다는 게 의미가 크다.
-처음 드라마 시작할 때 많이 긴장했었나.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전공이 연극영화과였다. 지금도 다시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고, 연기에 대한 욕심은 굉장히 많았다. 어릴 때부터. 알 파치노와 한석규 선배님의 연기를 좋아했다.
-주위의 시선과 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내 자존심한테만은, 내가 내 자신을 평가했을 때만큼은 잘할 수 있겠다 못하겠다 여부를 놓고 봤을 때 될 것 같으면 그냥 한다. 안 될 것 같으면 도전하지도 않는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시작한 것이고 그에 맞게 최종회를 할 때까지도 부끄러움 없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는, 내가 내 자신을 평가할 때는 굉장히 성공했다. (겸손투로 바꿔서) 아, 세편의 드라마를 하고 나니까 이제 조금은 연기에 대해 아는 것 같아요, 하고 겸손해지고 싶은 맘은 없다. 이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진실되게 연기했고 자신있게 연기했다. 드라마 몇편 해본 놈이 뭘 알아? 안다. 왜 모르나. 드라마 16부작을 하나 끝내놓으면 그만큼의 내공이 쌓인다.
-굉장한 워커홀릭으로 알려져 있다. 욕심, 오기, 근성도 많고 집중력 강하고 완벽주의의 기질도 가졌다. =맞다.
-근데 그런 면을 가진 사람들이 목표를 하나만 세우면 그것에 몰입하기가 쉬운데, 두개 이상이 될 때는 본인에게도 다른 식의 접근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수와 배우, 어느 쪽에서도 최고가 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당연히 사람의 욕심으로, 둘 다 성공하고 싶다.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머리를 잘 짜서 길 앞뒤를 잘 막아 그물을 쳐놓으면 두 마리를 다 잡을 수 있다. 난 언제나 준비를 많이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24시간 중에 12시간은 일하고 12시간은 잔다 쳤을 때 나는 24시간 중 10시간은 음반쪽 일, 10시간은 배우로서의 준비, 그리고 4시간을 잔다. 잠을 줄이면서 다른 일에 투자를 하는 거다. 그런 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걸 어긴 적이 있나. =당연히 어긴다. 사람이라는 게 늘 로봇처럼 움직일 순 없으니까. 어느 때엔 음반에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어느 때엔 연기에 더 신경을 많이 쓴다.
-평소 수면 시간은 어떻게 되나. =요즘에는 2∼3시간 정도 된다.
-그럼 그 시간을 쪼개서 무엇을 하나. =4집도 나와 있고, 미국 진출에 앞서 준비도 해야 하고, 월드 투어 준비도 해야 하고, 영화 홍보도 해야 하고, 또 얼마 전까지는 ADR을 했었다.
-박일순이란 캐릭터가 본인의 코드와 잘 맞았나. =그렇다. 재미있었다. 우선 내가 그렇게 밝은 모습을 더 가졌다는 걸 처음 알았고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 내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건 감독님이 많이 끄집어내주셨다.
-어떻게 끄집어내주셨나. =그냥 나도 모르게. 감독님은 그냥, 해봐, 해봐, 하셨다. 어차피 HD니까. 하드 용량이 1시간이다. 1시간 내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이런 분위기였다. 스무 테이크, 서른 테이크, 계속 가는 거다.
-유난히 많이 갔던 테이크는 얼마나 됐는지. =내가 성이 안 차서 서른두 테이크까지 간 적이 있다.
-감독님은 몇 번째 테이크에서 오케이하셨나. =열서너 번째였던 것 같다.
-그걸 본인이 20테이크나 더 갔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만족할 만한 걸 얻었나. =만족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전에 분명 다른 시나리오들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왜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데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가. =사실 이 작품을 하기 전에 좋은 시나리오가 두개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다 개봉해서 둘 다 되게 잘됐다. 노선을 바꾼 이유는, 그냥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었고 신뢰였다. 처음에는 영화를 하면, 굉장히 좋은 선배님이 주연이라면 내가 조연으로 한번 시작해봐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게 뭐랄까, 충무로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고 내가 첫 단추를 끼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박찬욱 감독님에게 제의를 받고 다른 얘기들도 듣고 보니, 박 감독님 영화와의 연이라면 오히려 나에게 많은 플러스가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됐다. 흥행을 하고 싶어서라면 차라리 노래를 부르는 게 더 낫다. 돈도 많이 벌고, 외국 가서 활동하면서 명예도 더 얻고. 하지만 이걸 하는 이유는 나만의 욕심 때문이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그래, 나는 연기도 꽤 했고 노래도 꽤 했던 한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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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GUE
2006년 12월호
via Flow Blog 2007.01.01.
신데렐라 맨
4집 로 여의도 방송가와 세계 콘서트 무대에서 폭풍을 일으킨 가수 비,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작품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영화계에 후폭풍을 일으킬 배우 정지훈.
그를 인터뷰하면서 나는 '신데렐라 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비에 대한 촬영을 준비하면서 내 머릿속에 최초로 떠오른 뒤죽박죽 이미지 목록은 이랬다.
첫 번째,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신사 -마그리트의 그림<골콘다> 혹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두번째,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 공연계와 CF계에 신드롬을 일으킨 팝과 클래식의 크로스 오버. 세번째, 구름속의 비 -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후신을 풍자한,
그러나 알고 보니 비의 팬클럽 이름과 유사함.
거대한 날개와 덩굴나무, 그리고 요정 같은 발레리나들에 대한 장황하게 떠드는 나를 앞에 두고
사진작가 조세현은 '월드스타 비는 그 존재감만으로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그 말은 반쯤 맞고 반쯤은 틀렸다.
촬영 당일, 드디어 '비님'이 오였다. 여기서 '비님'이란 저널리스트 특유의
시선이 만들어낸 시니컬한 어휘가 아니다.
비는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촬영 스태프들, 그리고 족히 10명은 될 듯
보이는 패밀리 스태프들...말하자면
구름의 호위를 받는 기후신처럼 인의 장막 속에 등장했다.
그건 거대한 행렬처럼 보였고, 분장실 주위엔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이 쳐졌다.
맙소사, 한번도 이런 분위기에서 촬영을 진행해본 적이 없어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세계톱 매거진'의 피처 디렉터인 나는 전열을 가다듬고
'월드스타'의 분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비 씨? 아니 지훈 씨? 어떻게 불러야 하죠? 어째든 만나서 반가워요."
폭격 맞은 잔디 같은 머리카락을
쑥스러운 듯 만지면서 비가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호칭은 뭐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미안합니다.
제 머리카락이 손보기 전이라 엉망이에요."
우리는 잠시 서서 웃으며 비의 컴백 무대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아시다시피 입꼬리가 올라가는 비의 천진한 웃음은 모든 여자들을 연상의 누이처럼 만든다.
나는 그에게 '영원히 따뜻한 별이 되길' 이라고 적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기를 선물했고,
비는 내게 '많이 들어주세요'라고 쓴 4집 CD를 선물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빡빡한 시간 속에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강예나와 단원 김애리,배소희, 이상은, 김유선이
눈처럼 흰 발레복을 입고 몸을 풀고 있는 사이, 비가 랄프로렌의 클래식한
스트를 입고 들어왔다. 비는 발레리나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고요하고 집중력 있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다들 수능 직전 도서관에 모인 근엄한 수엄생들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먼지 알레르기를 호소하며 몇번 재채기를 한 게 고마울 정도였다.
한 치의 소음도 잡음도 없는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
발레리나들이 비를 둘러싸고 구애하는 듯한 포즈를 취할 때도, 비는 신사적이고
절도 있고 약간 나르시즘적이면서도 모범적인 제스처를 연출했다.
내가 의도했던 땀과 활력이 출렁대는 다소 장난기 있는 방탕한 무드는 아니었지만,
비와 발레리나는 서로의 역활을 중심으로 예의 바르고 균형감 있는 그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리허설이나 주문 없이도 서로 합을 딱딱 맞추는 즉흥 안무 같다고나 할까.)
그건 어느 정도 랄프 로렌적이었다. 랄프 로렌룩은 고객을 쇼킹하게 만들기보다는 교육을 받은
하이클라스가 몬타나의 플라이 낚시 여행갈때 꺼내 입는 랄프 로렌의 재킷과
코트가 밀리터리 팬츠와 찢어진 러닝 셔츠를 입고 춤추는 스물 네살의
대중 뮤지션 비에게 어울린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비와 발레리나와 랄프 로렌이 만들어내는 이 정중하고 안정감있고
극도로 수줍은 촬영의 키워드를 발견해내려고 애썼다. 미스터리는 풀렸다.
퍼펙트 프로포션! 프레시 프렌십! 그리고 프로페셔널 프로퍼겐다!
지금 비는 클리식 문화를 사랑하는 젊고 젠틀한 후원자로 분한 것이다.
비가 촬영을 하는 동안 JYP 엔터테이먼트 소속 다섯 명의 매니저들은
아래층 테이블에서 스케줄 보드를 놓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줄담배 연기 사이로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내가 지훈이 나이인 스물네살땐 마음껏 내키는 대로 즐기며 살았지."
"지훈이는 지금 이 엄청난 스케줄 속에서 죽을 맛일 거야."
이날 비는 <보그>와의 촬영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입양을 기다리며 보모의 팔에서 잠 든 미혼모의 아기를 품에 안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 조세현의 연말 자선 프로젝트에 동참하기 위해.
그 다음에도 몇 개의 방송 프로그램 스케줄이 그를 재촉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뮤직뱅크><음악중심><인기가요> 몇개의 오락 토크쇼와
라디오 게스트...스케줄, 스케줄, ?L이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
돌아오면서 나는 그의 단말마 같은 음성들을 떠올려 보았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거죠?" "아기는 어디 있나요?" 등등.
인터뷰를 위해 비를 다시 만난 건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어느 일요일 저녁 6시, 청담동 JYP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서 였다.
밖에는 일단 소녀팬들이 비를 행한 온갖 구애의 낙서로
빼곡한 건물의 주창장과 제과정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비를 기다리면서 나는 국수적인 한국 가요계를 세계적인 쇼비즈니스 무대로 접근시킨
영리한 마케터 박진영의 아우라를 관찰했다.
지하 안무 연습실과 위층의 작곡 스튜디오를 오가는 예쁘장한
미래의 남녀 가수들이 나를 볼 때마다 검은 눈을 빛내며 "안녕하세요?" 라고 우렁찬 인사를 했다.
어떤 아이는 무려 일곱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들은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외부인들에게 그렇게 정중하고 명랑하게
자신를 알리는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하긴, 비는 초기에 박진영에게 안무 연습과 함꼐 매일 신문 사설을 읽고
의견을 말하는 교육을 받았다지.
엔터테이너는 사회를 읽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철판에 'JYP Styl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1-모든 일에는 책임자가 있다.
2-모든 일엔 Deadline이 있다.
3-모든 일엔 가능한 방법이 있다.
4-모든 일은 시스템 속에서 한다.
헉! 저 문구는 가수가 아닌 잡지 기자에게 더 어울릴법한데!
사실 이 모든 것이 비의 성분을 이루는 하드웨어이자 소프트웨어일 것이다.
비는 미래적인 경영 마인드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쇼비즈니스 그룹에서 성장해왔다.
그가 단 4년만에 멀티 엔터테이너, 글로벌 스타로
성장한데는 개인을 산업화시키는 이런 자율적인 시스템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다섯명의 매니저 중 한명과 월드 투어 콘서트와 영화 홍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비가 들어왔다.
밀리터리 캡을 아무렇게나 눌러쓰고 체크무늬 후드코트, 블랙 스노 진을 입은 비는
심하게 호흡을 헐떡거렸다.
학동 사거리 근처에서 콘서트 회의를 하다가 달려온 것이다.
술 마시고 뛰어다니는 것 외엔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던 나의 수다스러운 스물 네 살에 비해,
그의 삶이 너무 규모가 크고, 즐거움을 주기 위한
공적 책임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그때요, 왜 며칠 전 촬영 때...발레리나 분들과 처음 해보는 거지만, 저 좋았어요.
발레를 좋아하고 발레리나를 존경하거든요.
노래, 연기, 춤, 발레 모두 뼈를 깎는 고통 같은게 있잖아요.
그게 그냥 직업이라기 보다는 천직, 같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말은 안 해도 존경심이 생겨요.
저 그분들 공연, 기회가 되면 꼭 보러 가고 싶어요."
그 순간 나는 스물 네 살 청년의 연한 속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보호적인 딱딱한 갑각류 성에서 나온 향기롭고 연한 청춘의 냄새.
사실 사진 촬영 이후 비와 인터뷰 스케줄을 잡는 것이 힘든 외교 협상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배우들과 달리 방송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는
TV토크쇼를 제외한 어떤 단독지면 인터뷰도 거부해왔다.)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신문 기사들은 단발적으로 그의 행보을 보고했다.
비가 암투병 중인 한 주부의 병원을 깜짝 방문해 위로했고,
4집 <레인스 월드>가 발매 첫날 10만장을 기록해 대박을 예고했다는 등등.
나는 그에게 스믈 네살에 이런 거대한 스케일의 삶을 살아내는 게 버겁지 않은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스케일이 크지 않아요.
사람들은 거대한 물량이 투입된 무대에서 춤추는 저를 봐요.
하지만 보세요. 실제로 전 아주 작아요.
무대에선 카리스마 넘치게 행동하지만 전 제가 끝도 없이 부족하다고 느끼죠."
"하지만 아시아 전역을 돌고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려 하잖아요?"
"제 진짜 활동 범위는 이 건물의 지하와 지상이 전부예요. 제가 24시간을 보내는 세상은
녹음실, 스튜디오, 연습실이 전부인 걸요."
창밖에 소녀 팬들이 무리를 지어 유폐된 성에서 땀을 흘리는 그를 지키고 있다.
"하나하나의 일을 할 때마다 에너지의 집중력이 너무 커요.
그 고통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 못해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콘서트 회의, 춤 연습, 영화 홍보, 인터뷰...
그런데 어차피 할 거면 제 욕심에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저는 아이돌 가수로 시작해서 연기자가 됐고, 다시 가수로 배우로
해외 진출까지 하려고 해요.
저는 '아이돌'에 화려하게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 대체되고 사라지는 게 싫었어요."
그는 파워풀한 댄스를 소화하는 이웃집 소년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스타 비가
왜 배우 정지훈이라는 또 하나의 삶의 배역을 선택했는지에 질문의 초점을 맞추며 말했다.
"연기를 시작할 때 제 결심은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자, 였어요.
<상두야 학교가자>로 드라마를 할 때 가수가 연기한다는데 편견이 많았어요.
연기하면 망한다고 다들 말렸어요.
단 한 명도 내 편이 없었어요.
진영이 형 조차도요. 그런데 전 연기에 욕심이 났고 그런 저를 믿었어요."
비의 말은 폭풍처럼 이어졌다. 마치 자신의 4년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듯 숨도 쉬지 않고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말을 쏟았다.
"<상두...>에서 다른 사람이 되서 즐거움을 맛봤어요.
그 드라마가 일본에서 히트 치면서 한류의 발판이 됐어요.
과도기를 겪었고 앨범을 냈고, 다시 <풀하우스>를 촬영했어요.
그 다음은 일본, 중국, 태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나갔어요.
3집을 시작하고 박찬욱 감독님 영화를 찍고
4집 를 내고 이젠...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시겠어요?"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스타 시스템'에 관한 포럼에서 JYP엔터테이먼트의
정욱 이사는 "훌륭한 엔터테어너 한명은 산업 전체가
해외 비지니스를 할 수 있는 표준을 만들어낸다."고 비를 프레젠테이션 했다.
비의 아시아 진출 과정은 국가에 따라 드라마로 면저 알려지거나 음반 활동을
먼저 시작하는 등 다양한 과정이 있었다.
이런 효과는 광고에서도 반복된다.비가 등장하는 광고에는 대부분
비가 직접 부른 노래가 삽입된다.
비는 이제 특정 타깃에 의해 소비되는 대체품이아니라 스스로
문화를 생산하고 현상을 만들어가는 '오리지널 인더스트리'가 된 것이다.
"1년만에 큰 변화가 있었어요.
아시아인 중에 남자 가수나 배우가 톱이 될 수 있는 시기가 온 거죠.
'타임100인'에 선정된 것도 세계 시장에서
아시아 스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걸 인정하는 거하고 생각해요.
할리우드가 이연걸,재키 찬과는 다른 아시아 스타를 찾고 있다고 느꼈어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가 말했다.
"<캐리비안의 해적3>의 주인공도 주윤발이 캐스팅 됐어요."
"제리 브룩 하이머를 만났어요?"
"네, 제리 브룩 하이머를 만났어요.
올랜도 블룸, 조니 뎁 대신 아시아 스타를 등장시키고 싶다고 했어요."
물론 영화계의 케스팅은 언제나 변수가 많다.
하지만 부산영화제 필름 마켓에서 할리우드에서
비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뉴스만 전해들은 나는 아직 영화 데뷔작도 공개되지
않은 비가 전설적인 할리우드의 프로듀서를 만나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게 놀라웠다.
"<타임100인> 행사에서 만났어요.
내년엔 배우로서든 가수로서든 선택해서
둘 중의 하나에 더 집중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전 언제나 준비되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월드투어를 시작하면서 영어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내년엔 모든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것 같아요."
비는 4년만에 이뤄낸 이 기적 같은 일이 어머니가 가져다 준 행운이라고 말했다.
"노력도 정말 많이 했어요. 하지만 시대적인 타이밍의 힘도 정말 무서워요.
아시아 전역이 Rain이라는 이름을 알린게 <풀하우스>였어요.
그런데 배우들은 보통 "안녕하세요?"만 하지만, 전 노래를 하잖아요.
그렇도 발라드가 아니라 강한 비주얼이 함께 들어가니까 폭발력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는 지금 박찬욱 감독의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복수 3부작 시리즈 이후 박찬욱 레이블의 새로운 작품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신세계 정신병원 최고의 커플,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소녀와 죄책감과 동정심이 없는 안티 소셜로 판정된 소년의 '사이코델릭한' 사랑이야기.
나는 매번 경천동지할 캐릭터와 스타일로 배우를 재창조하는
박찬욱이 이번엔 어떤 장난끼 어린 마법을 선보였을지 궁금했다.
"나 너 미워서 이러는 거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던 송강호, '누구냐, 너?"라고 칼을 갈던 최민식,
"너나 잘하세요."하고 조롱하던 이영애.
그리고 이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정지훈의 광적이면서도 팬시한 내레이션.
"<사이보그...>는 유럽에서 많이 기대하고 있대요.
음, 제 느낌엔 야구방망이로 뒷통수 맞는 그런 충격이 있을 거예요.
누구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스타일리시하고 웃기고 호러블하고...사람을 들었다 놨다...
사실 감독님 만나기 전에 초대박 영화 시나리오 3개가 들어왔어요."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과 그로부터 받은 영감에 대해 비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 했다.
우연한 술자리에서 박찬욱이 물었다.
"넌 뭐 좋아하냐?"
"액션 좋아합니다."
"액션만 하냐?"
"네?"
"난 멜로 할 건데 관심있냐?" 그렇게 둘은 의기투합했다.
"반찬욱 감독님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잘 모르세요.
많은 배우들이 박 감독님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시죠.
전 박 감독님의 오래된 팬입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초등학교 때 봤죠. <삼인조>는 중학교 때 봤구요.
<...JSA>와 복수 3부작 시리즈...그분은 제가 생각해온 많은 것을 바꿔놓았어요.
예를 들어 '그 배우 연기 잘하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감독님은 이러세요.
'별로인데. 그게 연기냐? 꾸미는 거지.'
사질 전 <이 죽일 놈의 사랑>을 하면서 진실한 연기에 푹 빠져 있었어요.
사람들이 오버한다고 수군대도, 정말 다른 사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짐승처럼 울기도 했구요. 이경희 선생님 대본에서도 그런 진짜 감정을 배웠거든요."
그러나 반찬욱은 그에게 진실된 연기도 하지 말고 꾸민 듯 꾸미지 말라고 했고,
정신병원엔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했다.
"어떤 모습이 나올지 저도 궁금해요."
나는 그에게 스타가 된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배불러졌죠. 굶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사람이 많아졌고, 하지만 잘 될 때 붙는 사람들 중엔 조심해야 될 사람도 많죠.
하지만 제 눈엔 다 보입니다.
제겐 어머니라는 종교가 있어요.제 앞길에서 저를 인도해 주시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예술가 타입은 아니셨는데...
이상하게도 전 어릴 때부터 이게 아니면 안 됐어요. 사회 나가서 가게를 하나?
공부를 열심히 하나? 그냥 춤추고 연기하면서 아이들한테서 박수받는 게 좋았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놀라운 건, 그가 내가 하려는 질문을 마치 독심술을 하려는 것처럼
한발 앞서서 읽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가 힘든 성장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어미니가 병원에서 투병 중일 때 그는 병원비가 없어서 혼자 울었다.
그리고 2년간 JYP 엔터테이먼트에서 청소하고 신문을 읽고 열심히 인사하고 춤을 췄다.
남보다 일찍 고퉁을 이기고 성장한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안는 사람,
그 꿈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겐 생에 대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있다.
그는 자신의 큰 재산으로 3가지를 들었다.
첫째, 가족.
둘째, 언제 굽혀야 하고 언제 지켜야 할 줄아는 유연한 자존심.
셋째,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현재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자신을
매년 업그레이드 되는 최신 휴대폰이나 과장,
대리 말단 사원을 조율하는 CEO, 혹은 애플사에서 개발한 아이팟에 비유했다.
그리고 자신을 발굴했던 박진영에 대해 "진영이 형은 늘 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분이시죠" 라고 얘기했다.
"저는 비난 받을 수록 성장하는 사람이예요.
작년 1월에 한 기자분이 제게 비꼬는 듯한 투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한다'고 했죠.
뉴욕 공연 후 공항에서 그분을 만났어요.
제 눈을 피하시길래, 더 다가가서 인사했어요.
누구나 전성기가 있고 거기서 내려와 떨어져야 할 때도 있어요.
내려오면 다시 산을 찾아 올라가면 돼요.
전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언젠가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때도 있겠죠.
그러면 전 거기에 연기를 플러스할 거고, 춤, 노래, 그리고
영어를 플러스해서 해외시장을 개척할 거예요.
토끼와 거북이의 싸움처럼 끝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전 또 산업 디자이너로 사업가로 변신해서 앞으로 갈 거예요.
저는 제 스스로 다른 사람이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될 거예요.
90년대 서태지가 그랬던것 처럼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저는 매년 새로운 비가 될 거예요."
지금은 사라진 역대의 많은 아이돌 스타들은
한 곳에 머물면서 이 스타덤이 계속 유지되길 바랐다.
때론 벅차게 감사하고 때론 극도의 불안에 떨면서
(심지어 몇몇 어린 가수는 불안감을 못 이겨유서를 쓰고 자살하기도 했다).
비가 그런 수동적인 태도를 벗어나 스스로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면서 얻게 된 예정된 결과는 그의 커리어에 유효 기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비는 내성적인 동시에 정열적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문득 나는 폭우 속을 달려가는 한 마리의 하얀 유니콘이 떠올랐다.
만약 누군가 비에게 심술궂은 비평을 한다면 그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올 초 메디슨 스퀘어가든의 공연에 대해
<뉴욕타임즈>가 "마이클잭슨의 카리스마와 어셔의 섹시한 매력,
팀버레이크의 팝적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고 혹평했다면
그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질주할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집에 오니, 지난 주 비가 출연한 오락 프로그램이 재방송 되고 있었다.
셔츠와 타이로 댄디한 멋을 낸 비가 TV속에서 말했다.
"고등학교 때 사랑했던 누나가 변심을 했어요.
저보다 다른 남자가 휠씬 부유하고 집안이 좋았던 거죠.
그때 울고 또 울면서 이를 악물었어요.
여러분, 부디 남자의 현재보다 남자의 책임감과 야망을 봐주세요."
그순간 나는 영화 <신데렐라 맨>이 떠올랐다.
대공황 시기, 가난과 부상으로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린
도전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복서 브래독의 별명.
그리고 헝그리 댄서에서 월드 스타가 된 비,
밟히며 더욱 강해지는 비에게 한국판 신데렐라 맨이라는 별명을 붙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처[2006.12-보그 코리아 (에디터/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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