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égtelen erőfeszítés, végtelen kitartás, végtelen szerénység. (Rain vezérelve)

Tudtam, hogy ránézésre nem tűnök valami nagy számnak, a megjelenésem sem túl vonzó, de a bensőm elég rendkívüli. Minden színpadra lépés előtt azt mondom magamnak, hogy én vagyok a legjobb, és minden előadás után ugyanúgy azt, hogy nem én vagyok. Ezért minden fellépés előtt 120 százalékosan kell felkészülnöm, hogy az előadáson 100 százalékos teljesítményt tudjak nyújtani. Ennek érdekében minden álló nap folyamatosan képzem magam. Már nagyon hosszú ideje alváshiányban szenvedek, mert ha éppen nem dolgozom, akkor vagy edzek, vagy a koreográfiákat és a dalokat próbálom. Éppen úgy, mint a filmfelvételek idején, ha valamit nem csináltam jól, képtelen vagyok aludni. Akár színészként, akár énekesként, a legjobbat kell tudnom kihozni magamból. De nem kell aggódni, hogy most nincs elegendő időm az alvásra, jut arra majd bőven a halálom után. (Rain)

Ez a fiatalság, ez az egészség... és a túlcsorduló önbizalom... az erőfeszítés, amit az oly hihetetlen előadásai sikeres megvalósításáért tett... és a tehetség, amit felmutat, ezek töltenek el spontán tisztelettel engem. Azt gondolom, hogy a történelem a fontos személyiségek között fogja jegyezni. Úgy, mint aki színészként és zenészként egyaránt sikeres lett. ...
Ami igazán meglepő Ji-hoonban, az az, hogy egyfajta düh, bosszúvágy és szomorúság, az összes efféle sötét, komor negatív motiváció az ő esetében rendkívül optimista és derűs módon ölt testet.
(Park Chan-wook rendező)

엄복동의 삶의 흔적 [수집] / Traces of Um Bok Dong's Life [Collection]



엄복동




[NAMU.WIKI] 일제 강점기의 전설적인 자전거 선수이자 자전거 도둑질을 수시로 일삼았던 상습 절도 범죄자.

[KO.WIKIPEDIA.ORG] 엄복동(嚴福童, 1892년-1951년)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자전거 선수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당시 별명은 "자전차왕(동양 자전거왕)" 이다. 일제시대 당시부터 해방 이후까지 여러차례의 장물 및 자전거 절도죄로 징역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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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06.20.

[KO.WIKIPEDIA.ORG] 1892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출생. 아버지는 선양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여러가지 문헌이나 참고자료를 찾아 보아도 어머님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성씨만 있다) 

[KO.WIKIPEDIA.ORG] (엄복동 동상의 현판 정보에 따르면 1892년 6월 20일 서울시 중구 오장동 14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952년 7월 20일에 생을 마감한것으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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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0.00.

[KO.WIKIPEDIA.ORG]  1910 자전거 경기 우승. 이미 10대 때부터 능력이 뛰어났다 


[NAMU.WIKI] 자전거 경기 우승.

[KO.WIKIPEDIA.ORG] 경기도 진위(현 평택시)의 자전거 가게 일미상회에서 배달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배운 엄복동은 1910년 자전거 경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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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04.13.

[KO.WIKIPEDIA.ORG] 1913년 4월 13일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문사가 개최한 자전거 경주대회(용산 연병장)에서 우승하는 등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활약하였다. 

[KO.WIKIPEDIA.ORG] 1913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본격 선수생활 시작.(서기 1913년 4월 13일 용산 일본군 육군연병장.(지금의 용산 미군부대로 추측이 된다) (서기 1913년 4월 27일 평양)

[NAMU.WIKI] 본격적인 선수생활은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NAMU.WIKI]  이 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고 다니게 된다.

[NAMU.WIKI]  엄복동이 자전거 경기에서 항상 골 직전 한바퀴 남았을 때 "엉덩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는 마지막 1바퀴가 남았을 때 스프린팅을 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엄복동의 모습에 "올라간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NAMU.WIKI] 상기 실 사진에서도 체형을 볼 때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은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장딴지로 추정해 보면 스프린터의 성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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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00.00.

[KO.WIKIPEDIA.ORG] 1918 장충단 공원 자전거 경기 우승. 

[KO.WIKIPEDIA.ORG] 1918년 장충단공원 경기에서도 우승했는데,당시 엄복동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질만큼 조선 민중들의 스타가 된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에서 초청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KO.WIKIPEDIA.ORG] (후문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갖은 억압이 싫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합중에 넘어지더라도 오뚜기 처럼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리는 투혼을 발휘 했다고 한다)

[KO.WIKIPEDIA.ORG] (경기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면을 관람을 하려 없는 돈을 쥐여짜가며 관람료를 지불해가면서 응원을 했고 엄복동 선수가 경기중에 엉덩이를 들어올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와 만세를 외쳤으며

[KO.WIKIPEDIA.ORG] 일부 아낙들은 바깥 치마 저고리를 풀어서 흔들며 응원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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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05.02.

[NAMU.WIKI] 한편, 일본의 우민화 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실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2] 그러나...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신나게 캐발라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KO.WIKIPEDIA.ORG] 1920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분 우승 (서기 1920년 5월 2일 경복궁) (서기 1920년 5월 21일 진주 덕진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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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05.03.


[NAMU.WIKI]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경성자전거 경기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동아일보의 1920년 5월 3일자 기사가 가장 당시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해 준다.



京城市民大運動會(경성시민대운동회)
동아일보 | 1920.05.03 기사(뉴스)



[NAMU.WIKI]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바쳐 주위를 돌 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뒤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嚴福童)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여 바퀴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 선수보다 댓 바퀴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없이 엄 선수의 어깨에 떠러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 선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내게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

고 우승 깃대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엄 선수를 구타하니 마침내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서,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압으로 군중은 헤치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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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05.21.

[KO.WIKIPEDIA.ORG] 1920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분 우승 (서기 1920년 5월 2일 경복궁) (서기 1920년 5월 21일 진주 덕진운동장)


湖南自轉車大會(호남자전차대회) 십륙일젼쥬에서 성대히거행하여
동아일보 | 1920.05.21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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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05.07.


大邱春季大運動會(대구춘계대운동회)
동아일보 | 1921.05.07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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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09.30.


論山自轉車運動會(논산자전차운동회)
동아일보 | 1921.09.30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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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0.22.


裡里自轉車運動(이리자전차운동)
동아일보 | 1921.10.22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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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1.08.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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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0.00.

[KO.WIKIPEDIA.ORG] 1922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KO.WIKIPEDIA.ORG] 1922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개최된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 심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빌미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인 관객과 조선인 관객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엄복동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KO.WIKIPEDIA.ORG] (이때 엄복동 선수가 1위로 달리고 있었으며 2위와의 차이가 경기장 3바퀴가 차이가 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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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4.06.


嚴選手重傷(엄선수중상)
동아일보 | 1922.04.06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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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05.04.


휴지통
동아일보 | 1922.05.04 기사(가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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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5.23.


奬忠壇(장충단)의 自轉車競走會(자전거경주회)
동아일보 | 1922.05.23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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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6.04.


觀衆四萬(관중사만)
동아일보 | 1922.06.04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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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05.

[KO.WIKIPEDIA.ORG] 1923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馬山(마산)에도大競走(대경주)
동아일보 | 1923.05.05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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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08.


동아일보 | 1923.05.08 기사(뉴스)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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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19.

 

휴지통
동아일보 | 1923.05.19 기사(가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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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5.31.


 

嚴福童君優勝(엄복동군우승) 대련에서일등에
동아일보 | 1923.05.31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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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6.22. 




自轉車大競技會(자전차대경기회)
동아일보 | 1923.06.22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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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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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5.03.

 

自轉車(자전거) 競走會(경주회)
동아일보 | 1924.05.03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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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5.04.


自轉車竸走會(자전차경주회) 昨日(작일)부터開幕(개막)
동아일보 | 1924.05.04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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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0.00.

[KO.WIKIPEDIA.ORG] 1925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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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6.09. 


[from DISTORTED]





[NAMU.WIKI]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아래의 기사로 비꼬기도 했다.

[NAMU.WIKI] 일본 상인들은 목전(직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여,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불러와(招致) 자전차 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해 죽기나(憤死)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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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8.28.

 

水災同情金(수재동정금)
동아일보 | 1925.08.28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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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6.18.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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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6.23.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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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7.05.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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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조선을 털러 왔다가 역으로 털리자 억지 판정을 내리려 했다는 내용이다.

[NAMU.WIKI] 이후로도 열린 경기에서 신나게 일본인들을 발라버리며 우승하였고, 이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는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면 엄복동 자전거"라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3]가 불리워질 정도로 둘의 인기는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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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7.10.


[NAMU.WIKI]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엄복동은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다. 최초 보도는 1926년, 마지막은 1950년으로 자전거 도둑 특성상 그 사이 확인되지 않은 더 많은 수의 자전거를 훔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동아일보 26년 7월 10일자(3면)는 엄복동의 절도장물 판매에 관한 재판결과에 대해 보도했다.
[NAMU.WIKI] 조선에서 자뎐거선수로 유명한 엄복동이가 절도와 공범자가 되야 징역을 하게 되엿다. 경긔도 부천군 다주면 댱의리에 원적을 두고 시내 병목뎡 이백십번듸에 거주하든 리효진(35)은 절도전과이범인자로 금년 이월 이십오일 이래 또다시 시내여러곳에서 남의 자뎐거 십여대를 훔처다가 시내쵸음뎡 백십일번듸에 원적을 두고 병목뎡 이백이십구번디에서 자뎐거영업을 하든 엄복동(35)의 뎜포에 가서 그것을 팔아달라고 의뢰하야 엄복동은 리효진과 함께 그 절취하여온 자뎐거를 여러차례 원산으로 가지고 가서 팔다가 사실이 발각되야 두명이모다 원산경찰서에 잡히여 함흥 디방법원에서 리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절도장물사보죄로 예심에 결뎡을 밧고 지난 구월 이십일에 리효진은 징역 사년 엄복동은 징역 일년륙개월에 벌금 오십원의 판결언도를 밧고 모다 그를 불복한 후 수일전에 경성 복심법원으로 공소하여 올라와 당대 조선에서 자뎐거 선수로 그를 당할자가 업다고 하든 용감한 엄복동도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텰창 밋헤서신음하고 잇는 중이더라. 기사

[NAMU.WIKI] (현대 국어)
조선의 유명한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이 절도 공범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4]에 본적을 두고 시내 병목동 229번지에 거주중인 리효진(35)은 절도 전과 2범으로 올해 2월 25일 부터 시내 곳곳에 있는 타인의 자전거 십여대를 훔쳐다가 시내 초음동 111번지에 본적을 두고 병목동 129번지에서 자전거 매장을 운영중인 엄복동에게 팔아달라고 의뢰하였다. 엄복동은 리효진과 함께 훔친자전거를 수차례 원산에 가서 판매하다가 발각되어 두명 모두 원산 경찰서에 체포되어 리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장물취급죄로 지난 9월 20일에 각각 징역 4년, 징역 1년 6월에 벌금 50원의 판결을 받았으나 두명 모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몇일 전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고, 한때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써 당할자가 없다고 여겨지던 용감한 엄복동은 지금도 서대문 형무소의 철창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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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08.15.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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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0.07.


嚴福同公判(엄복동공판)
동아일보 | 1926.10.07 기사(뉴스)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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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06.20.


平壤(평양)에開催(개최)되는 男女自轉車競技(남여자전거경기)
동아일보 | 1928.06.20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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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06.23.


百餘選手出戰(백여선수출전)에 女子(여자)도十餘名(십여명)
동아일보 | 1928.06.23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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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06.25.


[KO.WIKIPEDIA.ORG]1928 전국운수조합대회 우승.

[KO.WIKIPEDIA.ORG]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참여했으며

[NAMU.WIKI] 1928년 6월 25일 평양 조선인 윤업조합 주최 제2회 전조선 자전차대회 예선 1위 이후엔 35년 전주 자전거경기회와 함흥자전거경기, 38년 경북 안강 윤업조합 주최 경기 등의 참가가 기사화되었으나 등수에 들지 못했다. 47년에는 런던 올림픽출전자격을 놓고 벌이는 자전거대회를 원로자격으로 관람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49년 7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에서 노장 3천미터 1위를 끝으로 공식 경기기록은 없다.기사



人氣集中裡(인기집중리)에 妙技(묘기)의豫選戰(예선전)
동아일보 | 1928.06.25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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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00.00.

[KO.WIKIPEDIA.ORG] 1929 은퇴. 당시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중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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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09.06.


十八少婦(십팔소부)가 本夫殺害未遂(본부살해미수)
동아일보 | 1931.09.06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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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4.00.


[KO.WIKIPEDIA.ORG] 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KO.WIKIPEDIA.ORG] 1932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1만미터 경기 우승. 이 때 나이 무려 41세 (당시 참가한 선수들의 나이가 20대 인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이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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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03.31.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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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05.31.


咸興自轉車競技(함흥자전거경기) 盛况(성황)으로終幕(종막)
동아일보 | 193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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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07.12.


自轉車競技(자전거경기) 定州(정주)에서盛况(성황) 
동아일보 | 193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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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6.03.


載寧自轉車大會(재령자전차대회) 兩日間大盛况(양일간대성황)
동아일보 | 193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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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04.29.


安康輪業組合主催(안강윤업조합주최) 自轉車競技會盛况(자전거경기회성황)
동아일보 | 1938.04.29




安康輪業組合主催(안강윤업조합주최) 自轉車競技會盛况(자전거경기회성황)
동아일보 | 193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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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0.25.


神宮自轉車大會(신궁자전차대회) 記錄全部更新(기록전부갱신)
동아일보 | 193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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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05.05.


名勝德津河畔(명승덕진하반)에서 自轉車競技會(자전거경기회) 來十三(내십삼),四兩日開催(사양일개최)
동아일보 | 193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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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05.16.


自轉車競技(자전거경기) 全州(전주)서大盛况(대성황)
동아일보 | 1939.05.16

 




自轉車競技(자전거경기) 全州(전주)서大盛况(대성황)
동아일보 | 193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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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0.17.


서울의 表情(표정) (10) 씩씩한우리女性(여성)들
경향신문 | 1946.10.17 기사(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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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05.04.

동아일보 | 1947.05.04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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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0.02.

[from 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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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7.27.

Source: Naver News Library


Source: Naver News Library


Source: Naver News Library


Source: Naver News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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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04.01.


[NAMU.WIKI] 경향신문 50년 4월 1일자에도 엄복동의 절도사건을 다루고 있다.



옛날의銀輪王者(은륜왕자) 自轉車(자전거)를 훔치다들켜
동아일보 | 1950.04.01 기사(뉴스)


 



[NAMU.WIKI]
옛날의 은륜왕자 자전거 훔치다 들켜.
비행사 안창남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은륜계에 명성을 날리던 엄복동(61)씨는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구속되었으나 인정검사의 따뜻한 온정으로 석방된 사실이있다. 즉 왕년에 자전거선수로 천하에 용명을날리던 엄복동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육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지금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날 그날의 끼니에 어려워 지난 22일 시내종로구 청진동 575번지 박연이씨 댁 앞을 지나다 훌륭한 자전거 한 대가 박씨 문전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자전거가 대단히 훌륭한데 욕심이 나서 그 자전거를 훔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안희경 검사의 담당하에 취조를 받아왔는데 안검사는 엄의 과거지사와 현재의 사정에 동정하는 바 있어 30일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고 한다. 기사


[NAMU.WIKI] 동아일보 50년 4월 1일자(4면)는 엄복동의 절도사건에 대해 보도하였다.



自轉車王(자전차왕)·嚴福童(엄복동) 自轉車(자전거)훔치고鐵窓往來(철창왕래)
경향신문 | 1950.04.01 기사(뉴스)

 



[NAMU.WIKI]
자전차왕 엄복동 자전거 훔치고 철창왕래
자전차왕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경기도 양주군 창천면 덕계리 이삼육 엄복동(61)은 생활에 궁한 나머지 지난 3월 22일 오후 9시경 시내 종로구 청진동 반역이씨 소유의 자전차 시가 약 3만원을 절취한것이 탄로되어 검찰청에서 문초중 30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한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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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07.20.


[KO.WIKIPEDIA.ORG] (엄복동 동상의 현판 정보에 따르면 1892년 6월 20일 서울시 중구 오장동 14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952년 7월 20일에 생을 마감한것으로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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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이것이 엄복동의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NAMU.WIKI] 당시 엄복동이 자전거 도둑으로 잡혔던 때가 1926년1950년 3월[5]인데 당시 자전거는 지금의 자전거와 위상이 다른 상당히 비쌌던 물건이다. # 기사에도 나오지만 비싼 자전거는 수십 가마니 수준이고, 엄복동이 26년 잡혔을 당시 훔친 자전거는 한 대가 아니라 십여대였다.

[NAMU.WIKI] 1950년 절도사건의 경우 3만원이라고 가격이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1950년 4월 기사#를 보면 당시 쌀 가격은 약 8kg에 2300원을 돌파한 상황이었으니 엄복동이 훔친 자전거는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인 9300원#에 비교하면 3배 이상이고 50년 4월에 조사한 서울의 5인가구 1개월 생활비가 약 4만원인 것을 감안하면[6] 현대기준으로는 3~400만원짜리 자전거를 훔친 것이다.

[NAMU.WIKI] 자전거가 왜이리 비싸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나, 당시 공업기술은 지금만큼 좋지 않았기에 정밀한 부품으로 구성된 자전거는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대부분 수제로 조립되었으며, 특히 대한민국은 50년 당시 자전거 생산 기반이 없어[7] 자전거 자체를 전량 수입(일본,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 구리, 알루미늄같은 산업 필수 금속의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기에 가격이 더욱 치솟았다.

[NAMU.WIKI] 자전거가 현대처럼 가격이 내려간 것은 대만에 있는 위대한 거인이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을 1980년대 말에 통일시키면서 자전거 가격 하락이 시작된 것이다. 1기 신도시 개발로 인해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인 1993년만 해도, 외제 로드바이크MTB 한 대 가격은 한국에서 600만원 정도 했다. 1993년 당시 현대자동차쏘나타 가격이 600만원이었다. 지금처럼 고급 로드바이크나 MTB가 50~100만원 대에 출시될 수 있는 것은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NAMU.WIKI] 이 때문에, 2019년 개봉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구설수에 올랐다. 아무리 당시 한일전에서 승리한 자전거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기에 항일투사로 보기도 어려운데다 자국 국민의 자전거를 훔쳐 팔아치운 범죄자인데 이런 인물을 영화를 통해서 미화를 해도 괜찮냐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의 미화 논란 문단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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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WIKIPEDIA.ORG] 비참한 말년[편집]

[KO.WIKIPEDIA.ORG] 하지만 엄복동의 말년은 비참했다. 8·15 광복 후에 엄복동은 이 없어 동두천,의정부 일대를 떠돌았으며, 1951년 해방후 한국전쟁때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KO.WIKIPEDIA.ORG]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혹여 어떤이는 둘째 아들을 만나러 가던중 북한군 비행기에 폭격을 당하여 사망 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집도 있었고 부인과 두아들이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KO.WIKIPEDIA.ORG] (당시에는 해방까지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금전적으로 궁핍한 삶은 살았고 한국전쟁까지 비참한 삶은 살았다고 전해지고 워낙 비참하게 살았는지 여러가지 목격담이 많았다.)

[KO.WIKIPEDIA.ORG] (일부 문헌에서는 부인과 첫째 아들은 전쟁통에 사망을 하였고 둘째 아들은 지금까지도 생사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설과

[KO.WIKIPEDIA.ORG]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엄복동은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복동은 유명한 선수였지만 그의 가족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말했다.

[KO.WIKIPEDIA.ORG] 엄복동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 중에 그는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 엄만길을 찾았다. 그 후로 가족들은 엄복동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엄복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엄복동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은 그가 1951년 1·4후퇴 때 동두천 부근의 야산에서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했던 자전거 영웅 엄복동의 최후는 쓸쓸했다. 엄복동의 아내와 두 딸도 전쟁 중에 소식이 끊겼다. 전쟁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아들 엄만길 뿐이다.) 라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KO.WIKIP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자전거 왕 엄복동 - 조선 민중의 영웅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2013. 1. 20., 장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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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들 / Sources:

- https://yoshimin-channel.com/blog/?p=47852#190317
- https://namu.wiki/w/엄복동#fn-1
- https://ko.wikipedia.org/wiki/엄복동
- http://cafe410.daum.net/_c21_/home?grpid=sAoB
- https://newslibra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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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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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 엄복동 







엄복동




이름   엄복동(嚴福童)
국적   대한민국 🇰🇷

생몰년도   1892년, 서울특별시 중구 오방동~
                 1951년(?),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종목   사이클
별명   동양 자전거왕



목차

1. 소개
2. 위대한 챔피언
3. 자전거 도둑
4. 최후
5. 엄복동의 자전거
6. 주요연표
7. 주요 링크
8. 대중매체




1. 소개


일제 강점기의 전설적인 자전거 선수이자 자전거 도둑질을 수시로 일삼았던 상습 절도 범죄자.



2. 위대한 챔피언

본격적인 선수생활은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 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고 다니게 된다.

엄복동이 자전거 경기에서 항상 골 직전 한바퀴 남았을 때 "엉덩이를 들었다"고 한다. 이는 마지막 1바퀴가 남았을 때 스프린팅을 쳤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 모습을 본 관중들은 엄복동의 모습에 "올라간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상기 실 사진에서도 체형을 볼 때 허벅지의 대퇴사두근은 옷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장딴지로 추정해 보면 스프린터의 성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1]

한편, 일본의 우민화 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실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2] 그러나...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신나게 캐발라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에 일어난 상황은 경성자전거 경기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동아일보의 1920년 5월 3일자 기사가 가장 당시 상황과 감정을 잘 전달해 준다. 

여덟 사람이 용기를 다 바쳐 주위를 돌 때, 다른 선수들은 불행히 중도에서 다 뒤떨어지고, 오직 선수 엄복동(嚴福童)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그나마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은 삼십여 바퀴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 선수보다 댓 바퀴를 뒤떨어져, 명예의 일등은 의심없이 엄 선수의 어깨에 떠러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령함에 엄 선수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내게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라!"

부르짖으며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까짓 우승기를 두었다 무엇하느냐!"

고 우승 깃대를 잡아꺾으매,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들어 엄 선수를 구타하니 마침내 목에 상처가 나고 피까지 흘리게 되매,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 안으로 물결같이 달려들어서, 욕하는 자, 돌 던지는 자, 꾸짖는 자 등 분개한 행동은 자못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경관의 진압으로 군중은 헤치고, 대회는 마침내 중지가 되고 말았는데, 자세한 전말은 추후 보도하겠으나 우선 이것만 보도하노라.


조선을 털러 왔다가 역으로 털리자 억지 판정을 내리려 했다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열린 경기에서 신나게 일본인들을 발라버리며 우승하였고, 이는 당시 비행기 조종사였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간에는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면 엄복동 자전거"라는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3]가 불리워질 정도로 둘의 인기는 엄청났다.

동아일보 1925년 6월 9일자(3면)는 단평(短評) 코너에서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아래의 기사로 비꼬기도 했다. 

일본 상인들은 목전(직전) 자전차 경주에서 조선인에게 일등을 빼앗겨서 분하다 하여, 일본에 있는 선수들을 전부 불러와(招致) 자전차 경주회를 연다고. 또 지면 분해 죽기나(憤死) 할는지. 
1928년 6월 25일 평양 조선인 윤업조합 주최 제2회 전조선 자전차대회 예선 1위 이후엔 35년 전주 자전거경기회와 함흥자전거경기, 38년 경북 안강 윤업조합 주최 경기 등의 참가가 기사화되었으나 등수에 들지 못했다. 47년에는 런던 올림픽출전자격을 놓고 벌이는 자전거대회를 원로자격으로 관람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49년 7월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에서 노장 3천미터 1위를 끝으로 공식 경기기록은 없다.기사 



3. 자전거 도둑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엄복동은 생전 자전거 수십 대를 훔쳐 장물로 팔았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전적이 있다. 최초 보도는 1926년, 마지막은 1950년으로 자전거 도둑 특성상 그 사이 확인되지 않은 더 많은 수의 자전거를 훔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동아일보 26년 7월 10일자(3면)는 엄복동의 절도장물 판매에 관한 재판결과에 대해 보도했다.

조선에서 자뎐거선수로 유명한 엄복동이가 절도와 공범자가 되야 징역을 하게 되엿다. 경긔도 부천군 다주면 댱의리에 원적을 두고 시내 병목뎡 이백십번듸에 거주하든 리효진(35)은 절도전과이범인자로 금년 이월 이십오일 이래 또다시 시내여러곳에서 남의 자뎐거 십여대를 훔처다가 시내쵸음뎡 백십일번듸에 원적을 두고 병목뎡 이백이십구번디에서 자뎐거영업을 하든 엄복동(35)의 뎜포에 가서 그것을 팔아달라고 의뢰하야 엄복동은 리효진과 함께 그 절취하여온 자뎐거를 여러차례 원산으로 가지고 가서 팔다가 사실이 발각되야 두명이모다 원산경찰서에 잡히여 함흥 디방법원에서 리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절도장물사보죄로 예심에 결뎡을 밧고 지난 구월 이십일에 리효진은 징역 사년 엄복동은 징역 일년륙개월에 벌금 오십원의 판결언도를 밧고 모다 그를 불복한 후 수일전에 경성 복심법원으로 공소하여 올라와 당대 조선에서 자뎐거 선수로 그를 당할자가 업다고 하든 용감한 엄복동도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텰창 밋헤서신음하고 잇는 중이더라. 기사

(현대 국어)
조선의 유명한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이 절도 공범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4]에 본적을 두고 시내 병목동 229번지에 거주중인 리효진(35)은 절도 전과 2범으로 올해 2월 25일 부터 시내 곳곳에 있는 타인의 자전거 십여대를 훔쳐다가 시내 초음동 111번지에 본적을 두고 병목동 129번지에서 자전거 매장을 운영중인 엄복동에게 팔아달라고 의뢰하였다. 엄복동은 리효진과 함께 훔친자전거를 수차례 원산에 가서 판매하다가 발각되어 두명 모두 원산 경찰서에 체포되어 리효진은 절도죄로, 엄복동은 장물취급죄로 지난 9월 20일에 각각 징역 4년, 징역 1년 6월에 벌금 50원의 판결을 받았으나 두명 모두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몇일 전 경성 고등법원으로 이관되었고, 한때 조선의 자전거 선수로써 당할자가 없다고 여겨지던 용감한 엄복동은 지금도 서대문 형무소의 철창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경향신문 50년 4월 1일자에도 엄복동의 절도사건을 다루고 있다. 

자전차왕 엄복동 자전거 훔치고 철창왕래
자전차왕으로 한때 이름을 날리던 경기도 양주군 창천면 덕계리 이삼육 엄복동(61)은 생활에 궁한 나머지 지난 3월 22일 오후 9시경 시내 종로구 청진동 반역이씨 소유의 자전차 시가 약 3만원을 절취한것이 탄로되어 검찰청에서 문초중 30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한다.기사


동아일보 50년 4월 1일자(4면)는 엄복동의 절도사건에 대해 보도하였다. 

옛날의 은륜왕자 자전거 훔치다 들켜.
비행사 안창남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은륜계에 명성을 날리던 엄복동(61)씨는 그 옛날의 명성도 어디로 생활에 궁한 나머지 남의 자전거를 훔치려다 구속되었으나 인정검사의 따뜻한 온정으로 석방된 사실이있다. 즉 왕년에 자전거선수로 천하에 용명을날리던 엄복동은 세월이 흘러 어느덧 육순이 넘은 노인이 되어 지금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덕계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날 그날의 끼니에 어려워 지난 22일 시내종로구 청진동 575번지 박연이씨 댁 앞을 지나다 훌륭한 자전거 한 대가 박씨 문전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자전거가 대단히 훌륭한데 욕심이 나서 그 자전거를 훔치려고 하였으나 그만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안희경 검사의 담당하에 취조를 받아왔는데 안검사는 엄의 과거지사와 현재의 사정에 동정하는 바 있어 30일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고 한다. 기사

이것이 엄복동의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당시 엄복동이 자전거 도둑으로 잡혔던 때가 1926년1950년 3월[5]인데 당시 자전거는 지금의 자전거와 위상이 다른 상당히 비쌌던 물건이다. # 기사에도 나오지만 비싼 자전거는 수십 가마니 수준이고, 엄복동이 26년 잡혔을 당시 훔친 자전거는 한 대가 아니라 십여대였다.

1950년 절도사건의 경우 3만원이라고 가격이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1950년 4월 기사#를 보면 당시 쌀 가격은 약 8kg에 2300원을 돌파한 상황이었으니 엄복동이 훔친 자전거는 쌀 한 가마니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공무원 월급인 9300원#에 비교하면 3배 이상이고 50년 4월에 조사한 서울의 5인가구 1개월 생활비가 약 4만원인 것을 감안하면[6] 현대기준으로는 3~400만원짜리 자전거를 훔친 것이다.

자전거가 왜이리 비싸냐고 의아해 할 수 있으나, 당시 공업기술은 지금만큼 좋지 않았기에 정밀한 부품으로 구성된 자전거는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또한 대부분 수제로 조립되었으며, 특히 대한민국은 50년 당시 자전거 생산 기반이 없어[7] 자전거 자체를 전량 수입(일본,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 구리, 알루미늄같은 산업 필수 금속의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했기에 가격이 더욱 치솟았다.

자전거가 현대처럼 가격이 내려간 것은 대만에 있는 위대한 거인이 전 세계 자전거 프레임을 1980년대 말에 통일시키면서 자전거 가격 하락이 시작된 것이다. 1기 신도시 개발로 인해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기인 1993년만 해도, 외제 로드바이크MTB 한 대 가격은 한국에서 600만원 정도 했다. 1993년 당시 현대자동차쏘나타 가격이 600만원이었다. 지금처럼 고급 로드바이크나 MTB가 50~100만원 대에 출시될 수 있는 것은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이 때문에, 2019년 개봉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구설수에 올랐다. 아무리 당시 한일전에서 승리한 자전거 챔피언이라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기에 항일투사로 보기도 어려운데다 자국 국민의 자전거를 훔쳐 팔아치운 범죄자인데 이런 인물을 영화를 통해서 미화를 해도 괜찮냐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의 미화 논란 문단도 참조. 



4. 최후

이렇게 엄복동은 광복 후 그 말년이 아름답지 못했는데,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을 다 탕진하고 집이 없어 지금의 동두천시의정부시 일대를 떠돌았으며, 6.25 전쟁 시기가 한창이던 1951년 양주군 이담면(지금의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5. 엄복동의 자전거

등록문화재 466호로 지정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자전거는 1920년 자전거 경기 때 영국의 러지(Rudge-Whitworth)사[8]에서 1910~1914년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자전거 중 가장 오래된 자전거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자전거이다.

차대번호는 1065274

1920년 경기 당시 영국 러지사에서 자전거 홍보를 겸하여 엄복동에게 증여하였으며, 이후 엄복동의 우승신화와 함께하게 되었다. 맨 위 1923년 경평대회 우승기와 같이 있는 자전거와는 핸들바가 다르며, 그 외의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뒷 코그는 트랙 경기용과 동일한 1개 짜리 고정기어 방식. 프레임은 강철재이며 토클립, 경량화되어있는 체인링 등 당시 트랙용 자전거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림은 목재로 몇 겹의 나무 층으로 라미네이팅 공법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당시 경량화를 위해 1940년대까지 트랙 경기용으로 흔히 사용하던 방식이라고.[9]

타이어는 당연히도 클린처 개발 초기(미쉐린에서 개발)였던 관계로 트랙용으로는 사용을 안하고 있어서 튜블러.

이 자전거는 엄복동의 1929년 은퇴 후 후배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를 다시 박성열씨가 받아 소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박성열씨[10]는 이 자전거를 들쳐업고 피난을 와서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문화재 등록 당시 소유주는 김근우씨로 상세한 사항은 주요 연표 참조.




6. 주요연표

  • 1892 탄생. 아버지 엄선양, 어머니는 김씨.
  • 1910 자전거 경기 우승.
  • 1913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본격 선수생활 시작.
  • 1918 장충단 공원 자전거 경기 우승.
  • 1920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분 우승(?) - 본문 내용 참조.
  • 1922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 1923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 1925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 1926 자전거 절도 장물 사보죄로 징역1년6개월에 벌금 50원[11] 판결.
  • 1949 대한자전거경기연맹주최 제1회전국 자전차 급종별 경기대회 노장 3천미터 1위.
  • 1950 자전거 절도로 체포 후 기소유예.
  • 1951 사망 추정.
  • 1977 대한사이클연맹에서 1999년 까지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 개최.
  • 2010 엄복동배의 마지막 경기일인 8월 24일을 기점으로 그의 자전거를 근대 문화재로 등록.(등록공고, 등록문화재 제466호)



7. 주요 링크



8. 대중매체

  • 1983년에 MBC에서 엄복동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화를 한 적이 있다.
  • 2004년 3월 21일에 MBC의 타임머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수홍의 진짜? 진짜!" 코너의 "자전거 대왕 엄복동"이라는 제목으로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1] 당시 아직 국내 경기 중에는 오르막을 오르는 등의 산악구간 경기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기도 트랙 혹은 드물게 구간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2] 실제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 이딴 짓을 자주 했다. 사실, 식민지에 대하여 우월감을 새기고자 당시 강대국들이 스포츠에서 이런 짓을 많이 했다. 영국은 크리켓으로 인도 팀과 경기를 가졌다가 그만 져서 망신을 당했고, 이 실화는 인도에서 라간이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축구로 이 짓을 했다가 크게 고전하면서 이러다간 우월감은커녕 망신만 당하겠다고 인도네시아 인들과 네덜란드 팀은 축구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축구에서 조선도 만만치 않아 1930년대만 해도 일본인이 들어간 팀이랑 경기를 하면 조선인 선수들은 작정하고 말 그대로 일본인 선수의 다리를 불구로 만들 의도로 격투기 축구를 신나게 일본인들에게 선사했다고. 결국 일본도 조선인들과 축구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3] 민요인 '청춘가'라는 노래를 개사한 곡이다.
[5] 1950년 4월 1일자의 기사가 있으니 엄복동이 자전거 도둑으로 잡혀서 감옥에 다녀온 것은 1950년 3월이다. 구속되었다가, 관련 기사에도 나오지만 당시 판사가 "인정"을 발휘하여 엄복동집행유예로 석방시켰다. 그리고 엄복동이 감옥에 다녀온 그 해에, 6.25 전쟁이 터진다. 
[7] 최초의 대한민국 국산 자전거는 1952년 기아산업(현 삼천리자전거)에서 생산되었다. 
[8] 1894년부터 자전거모터사이클을 만들던 회사. 사실 자전거보다는 모터사이클 회사라 보는 것이 옳다. 기아모터스가 그랬듯. 여튼, 궁금한 자덕은 위키피디아의 Rudge-Whitworth(영문) 참조. 혁신적인 변속기설계와 경주용 오모터사이클의 디자인은 클래식 모터사이클 덕후들을 하악대게 만들 기 충분하고도 넘친다. 
[9] 도로경기(Criterium)에서는 강도의 문제로 사용하기 힘들었음. 
[10] 서울에 거주다가 2010년부터 일산신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도싸에 박성열씨의 제자가 활동하고 있다. 궁금한 자덕은 검색해 볼 것. 가끔 한강에서 새끈한 카본프레임에 팀 져지 쫙 빼입고 깝쭉대는 로드게이를 녹슬은 유사 MTB 끌고나와 발라버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속설이 있다. 
[11] 지금으로 치자면 수백만원 값어치다. 소설 상록수라든지 러디메이드 인생같은 당시 소설을 봐도 한달에 30원받는 직장인 언급이 나오는 걸 봐도 보통 직장인 한달 월급 이상급 값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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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WIKIPEDIA.ORG - 엄복동






엄복동


엄복동(嚴福童, 1892년-1951년)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자전거 선수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당시 별명은 "자전차왕(동양 자전거왕)" 이다. 일제시대 당시부터 해방 이후까지 여러차례의 장물 및 자전거 절도죄로 징역살이를 하였다.



목차

1 경력
1.1 삶의 봄
1.2 비참한 말년
2 기념사업
2.1 사이클 대회
2.2 동상위치
3 엄복동 자전거
3.1 주요 제원
4 연기한 배우
5 각주
6 출처



경력


삶의 봄

1892년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출생. 아버지는 선양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여러가지 문헌이나 참고자료를 찾아 보아도 어머님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성씨만 있다) (엄복동 동상의 현판 정보에 따르면 1892년 6월 20일 서울시 중구 오장동 14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952년 7월 20일에 생을 마감한것으로 쓰여져 있다)

경기도진위(현 평택시)의 자전거 가게 일미상회에서 배달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배운 엄복동은 1910년자전거 경기대회, 1913년4월 13일경성일보사매일신문사가 개최한 자전거 경주대회(용산 연병장)에서 우승하는 등 수많은 자전거 대회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장충단공원 경기에서도 우승했는데,당시 엄복동은 빨간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질만큼 조선 민중들의 스타가 된 엄복동은 자전거 대회에서 초청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휩쓸었다.

(후문에 의하면 일본인들의 갖은 억압이 싫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합중에 넘어지더라도 오뚜기 처럼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리는 투혼을 발휘 했다고 한다)

(경기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면을 관람을 하려 없는 돈을 쥐여짜가며 관람료를 지불해가면서 응원을 했고 엄복동 선수가 경기중에 엉덩이를 들어올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와 만세를 외쳤으며

일부 아낙들은 바깥 치마 저고리를 풀어서 흔들며 응원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22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개최된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 심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빌미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 이 일로 일본인 관객과 조선인 관객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엄복동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이때 엄복동 선수가 1위로 달리고 있었으며 2위와의 차이가 경기장 3바퀴가 차이가 났었다고 한다)

1928년 6월 전국운수조합 대회에도 참여했으며,1932년 4월에도 40세의 나이에 전 조선 남녀자전거대회 1만m 경주에 참여하여 당당히 우승하였다.

1910 자전거 경기 우승. 이미 10대 때부터 능력이 뛰어났다

1913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본격 선수생활 시작.(서기 1913년 4월 13일 용산 일본군 육군연병장.(지금의 용산 미군부대로 추측이 된다) (서기 1913년 4월 27일 평양)

1918 장충단 공원 자전거 경기 우승.

1920 경성시민대운동회 자전거 부분 우승 (서기 1920년 5월 2일 경복궁) (서기 1920년 5월 21일 진주 덕진운동장)

1922 장충단 자전차경주대회 우승.

1923 마산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 우승.

1925 상주 조선팔도자전거대회 우승.

1928 전국운수조합대회 우승.

1929 은퇴. 당시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중년이였다.

1932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1만미터 경기 우승. 이 때 나이 무려 41세 (당시 참가한 선수들의 나이가 20대 인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이겼다고 한다)


하지만 엄복동의 말년은 비참했다. 8·15광복 후에 엄복동은 이 없어 동두천,의정부 일대를 떠돌았으며, 1951년 해방후 한국전쟁때 동두천의 야산에서 폭격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혹여 어떤이는 둘째 아들을 만나러 가던중 북한군 비행기에 폭격을 당하여 사망 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집도 있었고 부인과 두아들이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에는 해방까지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금전적으로 궁핍한 삶은 살았고 한국전쟁까지 비참한 삶은 살았다고 전해지고 워낙 비참하게 살았는지 여러가지 목격담이 많았다.)

(일부 문헌에서는 부인과 첫째 아들은 전쟁통에 사망을 하였고 둘째 아들은 지금까지도 생사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설과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엄복동은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복동은 유명한 선수였지만 그의 가족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엄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말했다.

엄복동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 중에 그는 서울에 살고 있던 아들 엄만길을 찾았다. 그 후로 가족들은 엄복동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엄복동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진다. 엄복동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은 그가 1951년 1·4후퇴 때 동두천 부근의 야산에서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했던 자전거 영웅 엄복동의 최후는 쓸쓸했다. 엄복동의 아내와 두 딸도 전쟁 중에 소식이 끊겼다. 전쟁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아들 엄만길 뿐이다.) 라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전거 왕 엄복동 - 조선 민중의 영웅 (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2013. 1. 20., 장종수)



기념사업



사이클 대회

대한사이클연맹은 1977년부터 1999년까지 그를 기념하는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를 열었다.


동상위치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공설운동장 주차장 입구에있다.
1986년 대한사이클연맹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운 동상이 있다
이는 남산미술원 원장이던 원로조각가 이일영씨가 조각한 작품이며. 좌대 높이가 2.8m고 동상 높이는 3m짜리 청동입상이다


엄복동 자전거

문화재청2010년6월 8일 엄복동의 자전거를 근대문화재 등록을 예고하였으며, 동년 8월 24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지정하였다.[1]

엄복동이 사용한 자전거는 영국자전거모터사이클 제조 회사 러지휘트워스(Rudge-Whitworth)가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전거로서 문화재청은 문화재 등록 당시 “전면 상표의 일련번호 ‘1065274’를 통해 세계적인 희귀 기종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920년 경기 당시 일미상회가 소유하고 있던 이 자전거를 엄복동이 우승한 후 증여받아 선수 생활 기간에 사용하다가 후배에게 물려주었으며, 이후 자전거를 물려받은 선수가 한국전쟁 때 들쳐메고 피난했다는 일화도 전해질 정도로 엄복동의 자전거는 한민족의 수난을 같이 한 자전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자전거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하웅용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의 공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조 회사가 1930년대 폐업하고 관련 인물들도 모두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영국 국립 자전거 박물관의 스콧퍼드 로런스(Scotford Lawrence)가 생산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대한민국 자전거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이 자전거가 실제 엄복동이 사용했던 자전거임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제 그의 자전거는 서울시 강동구에 개인이 소장중에 있다 (사진속의 자전거와 실물의 자전거와는 핸들 모양과 페달 모양이 다르다)

주요 제원

  • 프레임 : 강철재
  • 구동 계통 : 싱글 고정 기어 방식
  • 휠 : 목재 복층 라미네이팅 스포크 휠
  • 타이어 : 미쉐린 튜블러 타이어
  • 기타 : 토클립, 경량 체인링 등


연기한 배우



각주

  1. 문화재청고시제2010-85호(문화재등록), 제17327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10. 8. 24. / 73 페이지 / 326.8KB



출처



엄복동 자전거 

대한민국등록문화재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466호
                  (2010년 8월 24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강동구

제작시기   1910년~1914년

소유자   김근우(前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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